“시는 영원한 사랑의 성서다!”
“시는 영원한 사랑의 성서다!”
  • 김규원
  • 승인 2022.05.0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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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고형렬(1954~. 강원 속초)처자전문

 

사랑이 가득한 사람의 모습[그림], 사랑이 충만한 가족의 모습[그림], 사랑이 넘치는 혈육의 모습[그림]이다. 가장 관능적인 모습[그림]을 상상케 하면서, 동시에 가장 성스러운 순백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 사람의 일이란 게 이렇게 아름답고, 즐겁고, 순결하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이런 방법, 이런 형식, 이런 그림으로 담아내고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를 수 없는 이 종합선물 세트 앞에서 독자는 잠시 숙고思考가 중단되는 듯, 미감에 전율하고 만다. 그 살 떨림의 실체란 무엇일까? 사랑의 원형을 직감하는 데서 오는 감동이리라.

그렇다! 사람답게 사는데 있어 사랑의 원형을 잃지 않는 것, 이것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일이란 따로 없다. 사랑의 참모습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최소한 사람의 길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첫째, 동심은 바로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원 질료다. 아이는 모두가 천사요 순백의 아름다움이다. 아무리 악독한 인간[어른]일지라도 아이를 바라보노라면 그저 밝은 미소가 저절로 번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런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순결을 잃는 대신, 흐려지는 영혼을 맞이한다는 것은 참 모순된 일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어른의 어버이라는 시인의 단호함이 비로소 실감 나게 다가온다.

이렇게 보자면 어른 되기 싫다고 후회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렇게 될 때 모든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후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순결을 잃는다는 뜻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순결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탐구를 멈출 수 없다. 그 길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그런 중에도 시는 아이의 순결에 다가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이 시를 보며 절감한다.

둘째, 모성애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거룩한 사랑의 원형이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이론을 앞서며, 현상을 초월한다. 주어진 조건도 없고, 만들어진 모양도 없으며, 특별한 방법도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성애의 본질이다

이제 겨우 말문을 틔운 아들에게, 징그럽게 커버릴 조짐을 보이기 전의 아들에게, 소년티가 번지기 전의 아들에게, 이제는 사물의 됨됨이를 겨우 분간할 만한 아들에게, 기저귀를 떼고 이제 겨우 걸음마를 완성한 아들에게, 유아어일망정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져 가는 아들에게,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구순기口脣期의 추억을 되살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고 가는 모자의 대화가, 모자의 욕실 풍경이 덥고 따뜻하게 번져 있을 하얀 김처럼, 메마른 어른[아빠]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고 말았던 것이다그리고 셋째 아버지의 사랑이다. 온전한 사람됨에 있어 아버지의 역할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감히 어디라고 모자가 연출하는 이 순백의 정경에 천방지축 뛰어들려 하는가? 그래서 수컷의 탈을 벗지 못하고서는 언감생심이다그래도 이를 지켜보는, 이를 전해 듣는, 그래서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는 아비의 철딱서니 없음이 있어 인류는 이렇게 번성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말이 있다.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며, 존경하는 사람이 어머니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 까닭을 이 시가 웅변한다. 욕실에서 오고 가는 모자간의 마음결 따라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의 실핏줄을 갖춘 아이가 참 행복한 어른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이를 모름지기 지켜보며, “우리[부부-부모]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아들]은 사랑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아비의 염원이 있기에 사람은 비로소 사랑을 완성할 수 있지 않는가!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 실체를 갖는 것. 사랑받아 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알듯이,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런 내밀한 사람됨의 비밀을 아름다운 뜻으로 그려낸 시는 그래서 영원한 사랑의 성서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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