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깨뜨려 고요를 그리다”
“고요를 깨뜨려 고요를 그리다”
  • 김규원
  • 승인 2022.04.11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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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거리는 시간이 있다

 

-이원(1968~. 경기 화성)고요전문

한국화를 칠 때 홍운탁월[烘雲托月: 구름을 색칠해 달을 그림]이란 기법이 있다. 주위의 것을 안받침하여 주체를 두드러지게 하는 필법이다. 하얀 포말을 쏟아내는 폭포의 물줄기를 동양화가는 그리지 않는다. 다만 주변의 바위를, 나무를 그리고 폭포는 여백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면 하얗게 남은 여백이 폭포의 물줄기가 된다. 구름에 가려진 달도 마찬가지다.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의 주변에서 지나가는 구름을 그리면 밝은 달빛은 저절로 드러난다.

고요를 어떻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게 할까? ‘고요란 명사는 고요하다란 형용사와 뿌리가 같은 말이다. 어떤 상태가 잠잠하고 조용한 것을 말한다. ‘잠잠하고 조용한 상태를 그릴 방법은 없다. 뭔가 움직임이 있고, 그에 따라서 소리가 나고 변화가 있을 때 그것을 그려낼 수는 있지만, 어떻게 움직임 없는 움직임을 그릴 것이며, 어떻게 소리 없는 소리를 들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시가 필요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영락없는 홍운탁월이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자니 움직이는 것을 그려서 보여준다. 소리 없는 것을 들리게 하자니 소리 있는 것을 들어서 소리 없음을 들려준다. 달을 그리지 않고 달 주위의 구름을 그림으로써 달을 그리는 기법을 원용한 셈이다. 시가 아니고서는 그런 그릇이 있을 수 없으며, 시인이 아니고서는 그런 작업에 엄두를 낼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시를 만나니 그런 생각이 굴뚝같다.

고요는 시간이자, 상태이며, 공간이자 환경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외부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시끌벅적한 시장 안에 있어도 고요를 체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깊은 산속 홀로 거처하는 암자에 있어도 온갖 소음 때문에 고요가 깨뜨려지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예전에 <아침고요정원>이라는 곳을 들렀다. ‘정원앞에 수식된 아침-고요가 참 단순하고 재치 없는 언어 감각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이 둘이 합하여 정원을 꾸미고 보니, ‘뭔가 다른 정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서늘함과 고요함이 깃들여 있지 않을까하는 야릇한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내 발길을 끈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종달새형 인간이다. 본성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때부턴가 새벽 일찍 일어나면서 맛본 그 형언할 수 없는 고요의 힘 때문에 일부러 종달새처럼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이 되었다. 저녁 10시면 일단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면 기상한다. 스님들이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도량석[道場釋: 도량을 정청하게 하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하여 새벽에 부처 앞에 예불하는 일 또는 그런 의식]을 하는 것에 비하면 일찍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꽤나 부지런 떨지 않으면 5시 기상도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일찍 일어나서 이어지는 일거수일투족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양치질이라도 하기 위해 수돗물을 틀면 참고 있었다는 듯이,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린다. 차라도 한 잔 마실 요량으로 물을 끓이노라면 물 끓는 소리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던 무슨 천둥소리처럼 요란하다. 실내화 끌리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의자 당기는 소리들이 일제히 함께 일어나 나 여기 있소!”라고 왜장치는 듯하다. 그런 이른 새벽의 소리들이 가족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소리들이 낮이라고 없었을 리가 없을 터이다. 다만 새벽 5시라는 이른 시간의 고요가 저들 소리들을 원래의 본성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우리의 육감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서 변질하여축소되거나 과장되어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고요를 어떻게 보이고, 느끼게 할까? 바로 이 시인에게는 비장의 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무도 일찍이 간직한 적이 없던 만능의 칼이 아닌가! 이 작품에는 여섯 개의 칼이 등장한다. 그 여섯 개의 칼이 마침내 닿은 곳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의 시 정신이 간직한 여섯 개의 칼은 시간을 저미는 칼인 셈이다. 그 시간은 바로 고요한 상태-상황이다. 시적 자아는 자신이 간직한 고유한 칼로 [고요한]시간을 저며내는데, 저며낸 시간의 맛이 참 달콤하고 섬세하며, 참신하고 싱그럽다, ‘고요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소리들을 들을 수 있겠는가(!?) 소리가 있으면 고요가 깨지고, 고요해야 소리가 들리는 모순 형용을 통해 고요를 들리고 보이게 하는 비법, 이게 그의 의장意匠이다.

우리에게도 사과를 깎듯 고요를 깎는 칼 한 자루 지녔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요에서 달콤한 과일즙이 솟아날 것이다. 고요가 아니고서 누가 시간의 속살에 닿을 수 있겠는가? 도무지 보이지도 않고, 도대체 만질 수도 없는 달(고요)을 시인은 한 자루 비상한 칼을 들고 나타나서 자유자재로 그려 보인다. 그의 붓질이 닿는 곳마다 구름()이 그려지고, 바위(폭포)가 그려지면서, 시로 보이는 아침고요정원의 싱그러운 시간이 자태를 드러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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