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 갔다
-진은영(1970~. 대전)「첫사랑」전문 |
세상은 정해진 법이 따로 있어서 그 법대로 움직인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보수라거나 혹은 기성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정해진 법이 따로 없고 세상은 정해진 법대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런 법은 그때그때 만들어진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진보적이라거나 혹은 신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나 기성세대라고 해서 모두가 정해진 법만 찾지도 않고, 또한 진보나 신세대라고 해서 모두가 기존의 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만 찾아 헤매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실정법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세상의 이치라고 할까, 혹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라고 하는 것을 그냥 ‘법’이라 했을 뿐이다. 노자老子 식으로 말한다면 ‘도道’라 해도 무방하고, 과학적으로 말하면 ‘理’라 해도 상관없으며,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치理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앞의 방법으로 세상을 보면 살기에는 편할 것이다. 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면 꽤나 험난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앞의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바꾸거나 이끌어 오지 않았고, 오히려 뒤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이끌려왔음을 증명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렇고, 생활방식의 변화가 그러하며, 정치제도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한 문명이네 문화네 하는 양상들을 들여다보노라면, 뭔가 새롭고 엉뚱하며, 삐딱하게 보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방식[법]대로 보는 것-사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 사람들에 의해서 현재의 최첨단 과학․기술문명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내 머리카락이 잘리느니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니스커트를 과감히 떨쳐입은 사람들에 의해서 생활방식은 천양지차로 변화되고 말았다. 어찌 그뿐인가? 서슬 퍼런 유신헌법의 부당성을 외친 사람들에 의해서, 독재의 군홧발에 짓밟히며 피 흘린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도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처럼 세상을 다르게 보려면 먼저 세상의 법에 대하여 궁금증[호기심]을 가져야 하며, 그 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삶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의문[질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호기심 없이 세상 문을 열 수 없으며, 질문 없이 성찰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호기심의 눈길과 질문하는 방식으로 세상의 문을 열어가는 장르가 시문학이다.
시는 세상이 던지는 법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잘 된 시를 읽고 나면 해답을 찾은 시원함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이 궁금해지는 묘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는 정답을 찾은 기쁨보다는 도리어 새로운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당혹해지고 만다. 그런 궁금증과 당혹함이 시를 읽는 사람의 세상을 바꾸게 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오묘한 시의 길이다.
이 시「첫사랑」역시 매우 평범한 소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읽고 나면 가슴 떨리는, 그러나 이제는 너무 멀리 흘러 와버린 ‘첫사랑’의 시절을 회상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연 ‘첫사랑’의 감정이, 순수가, 추억이, 경험이…, 뭐 이런 것이었던가? 당혹스러움, 애매함, 황당함…, 등으로 시를 대하는 이들을 내내 불편한 심기에서 풀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방식이라면, 단 4행으로 된 이 ‘첫사랑’이 던지는 질문이란 무엇일까? 이것 역시 단순하게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감정의 주체인 독자 저마다 지니고 있을 ‘첫사랑’에 관한 체험의 질량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성의 파고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떤 대통령 후보는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여자 친구에게 돼지 발정제를 먹였다는 경험담을 자랑삼아 세상에 드러내기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기만 했지, 차마 전하지도 못하고 말았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난관을 뚫고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필자는 이렇게 들을 수 있었다. 시적 대상인 소년이 시적 화자인 나[소녀]의 가슴에 넣어준 것이 바로 ‘물고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독자]가 첫사랑의 목소매를 잡고 넣어주었던 ‘물고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문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 미소가 바로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침착하지도 못했고, 용기도 없었을까?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서 나는 어느덧 세월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시적 화자의 가슴에서 약동하는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던지는 질문 역시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소녀의 감성과 소년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으나, 가슴 두근거리며 느꼈을 ‘첫사랑’의 순결한 박동 소리-생동하는 생체리듬의 기운마저 영 딴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독자] 역시 ‘세 마리의 고기떼’를 따라 ‘첫사랑’의 간이역을 지나오지 않았던가? 아니 어찌 세 마리뿐이겠는가? 갈림길 앞에서, 혹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모두가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것이 설령 상실이요, 영원한 별리로 이어질망정, ‘첫사랑’은 그렇게 ‘푸른 물살’을 헤엄쳐 나아가야 하는 운명이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