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西歸浦 찬가讚歌
서귀포西歸浦 찬가讚歌
  • 전주일보
  • 승인 2022.04.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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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시인
정성수 시인

서귀포 칠십 리에는 바다가 없다 
천지연폭포 언덕 옛 정의현청 관문에서 서귀진까지
시 공원에 시비와 노래비가 
서귀포를 지키고 있을 뿐

김춘수가 “이중섭李仲燮”의 붓을 든 채 황소의 뼛속을 궁금해하고, 강통원이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귀포를 생각한다.

“마라도”에서는 양중해가 “해양시초海洋詩抄”를 읊는 정한모를 흠모하면, “바람” 따라서 온 정완영이 “정방폭포正房瀑布” 앞에 선 박남수에게 손을 내밀 때 “정방폭포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박재삼이 말한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城山浦”에서 이생진이 구상에게 “한라산漢拏山”의 안부를 묻는 저녁 무렵. 이동주의 “서귀포西歸浦”나 한기팔의 “서귀포西歸浦”는 박목월의 “밤구름”처럼 서글프다. 정태권의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조미미가 한 곡조 뽑을 때 이미자가 정두수의 펜 끝에 펼쳐진 “서귀포 바닷가”에서 추억에 잠기면, 오민우가 “내 고향 서귀포”를 지킬 사람은 오직 나 뿐이라고 일갈한다.

손에 쥔 것이 없어도 좋은 손에 쥔 것이 있으면 더 좋은 
서귀포 칠십 리에는 
끝없는 갈대밭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바람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운명처럼 살아간다.

 

 

서귀포 천지연폭포 부근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인 돌날·긁개·홈날석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예래동 일대에는 고인돌 몇 기가 분포하고 있다. 사찰로는 중문동 하원리에 고려 말에 창건된 법화사지法華寺址가 있다. 법화사는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주원장朱元璋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피난처로 지은 궁전이었다. 1961년에 재건된 현재의 법화사 주위의 법화사지에는 지름이 65㎝나 되는 주춧돌과 70여 개의 축대가 남아 있어, 당초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지로는 정방폭포 위쪽으로 축성연대 미상의 서귀진성西歸鎭城(1589년 이축 함)의 자취가 군데군데 보인다. 조선 시대 서귀포시는 행정 구획 상 법환동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나누어져 동쪽은 정의현, 서쪽은 대정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교육기관인 향교도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서귀포시 교육문화권은 법환동 동쪽이 정의향교, 서쪽이 대정향교권에 속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난대림 식생을 나타내는 보목동 삼도森島에는 제주도 삼도 파초일엽자생지, 서흥동에 서귀포 담팔수 나무자생지, 보목동 파초일엽자생지, 도순리 녹나무자생지 군락, 색달동에 천제연 담팔수 나무, 천제연 난대림 지대, 서흥동 서귀포시 먼나무 등이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또한 서흥동에 제주도 무태장어서식지 · 서귀포층의 패류화석 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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