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정서는 우리의 삶을 고양시킨다.”
“시적정서는 우리의 삶을 고양시킨다.”
  • 전주일보
  • 승인 2022.02.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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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지상의 아랫도리가

버티다 못해 젖어들고

 

구름이

승천의 길목에서

목을 꺾고 말았다.

 

-이동백(1945~ 경북 안동)전문

가뭄이 심각한 한여름 농사철에 이런 시조를 봤더라면 참 좋았겠다. ‘장맛비도 제 길을 잃거나, 한여름의 소낙비도 점점 구경하기 어렵게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그런가 하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한 해 강수량이 하루 만에 폭우로 쏟아지기도 하고, 포근한 함박눈 구경한지도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바야흐로 기상이변, 자연이 스스로 자정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가뭄-홍수 등 천재지변조차 하늘[天帝]의 뜻이라 하여, 이런 불상사엔 임금부터 석고대죄[席藁待罪-거적을 깔고 엎드려 윗사람의 처벌을 기다림]하는 자세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곤 했다. 과학 만능 21세기에는 그런 기우제도 난감한 일이 되었다. <인디언기우제>라면 또 모를까.[이런 기우제는 비뚤어진 검사나리들의 전용물이라던가!]

그래서 좋은 시를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계절과 관계없이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에서 원하면 가 닿는 시심의 발길도 그렇게 방향을 안내하는 듯하여, 스스로 놀랍고 고맙다. 이 시를 만나기 전에 신달자 시인의불행에 먼저 눈길이 갔다. 4행으로 된 짤막한 작품이다. 평시조 한 수보다 더 압축되고 생략된 잠언 투의 자유시에 눈길-맘길이 머물렀다. “내던지지 마라/ 박살난다/ 잘 주무르면/ 그것도 옥이 된다가 전부다. 아무리 어렵고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지라도, 처한 불행에서 새로운 행운의 실마리를 찾으라는 뜻이다.

요즈음 3년째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 나라, 온 세계, 온 인류가 신음하고 있다. 이를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다. 뭔가 생활이 가능하려면 움직이고 서로 교류하며 왕래해야 하거늘, 그런 일체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이 망연하다.

그런 차에 이 작품를 대하고 보니 전혀 다른 미감의 세계에 젖게 된다. 그러면서 펜데믹의 엄중한 상황도 이런 미학을 접하면서, 신달자 시인이 제시한불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슬기롭게 극복했으면 좋겠다. 3646자로 이룬 평시조 한 편의 완결성과 내적 필연성에 저절로 미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형성의 울타리가 시문학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더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보는 좁아터진 일견一見이 상존하지 않았던가! 이 작품은 그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내면서 시조의 효율성과 심미적 울림이 어디에 근거할 수 있는가를, 시조창 한 수로 불러 젖힌 형국이다. 좋은 가객이 있어 이를 시조창으로 부른다면, 의미 깊은 시의 울림이 우리말의 청각영상과 맞물려 좋은 효과를 낼 것이 틀림없다.

초장에서는 ‘[이윽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이윽고는 다음과 같은 입말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참다 참다, 애간장을 태우고 또 태우다, 미루고 미루다……비가 오는 일은 이처럼 한낱 자연현상-기상의 한 현상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들에게는 절절한 생명 값에 버금하는 막중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니 비는 언제나 기다리고, 참고, 애간장을 태우고, 미루다결정적으로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물론, 이를 내려주는 하늘도 마찬가지다.

중장은 지상의 존재들에 대한 시각이다. ‘지상의 아랫도리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늘에서 생명수가 내리지 않으면 결국은 버틸 수 없는 하찮은 존재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UN에서는 아프리카 동부지역을 심각한 가뭄 기근 상습지역으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그곳은 초원지대가 가뭄으로 사막화되고 있으며,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어찌 동식물뿐이겠는가. 인간도 물을 얻기 위해 12시간 거리를 왕복해야 겨우 하루분의 생명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생명수가 없다면 모두가]하찮은 아랫도리일 수밖에 없다.

종장에서는 구름이[마저도]/ 승천의 길목에서/ 목을 꺾고 말았다하지 않는가! 지상의 아랫도리를 위해서 ‘[자유 자재할 수 있는]구름[마저도]’ 승천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 않는가. ‘목을 꺾고지상의 아랫도리를 흠뻑 적셔주기 위해 생명수[]를 쏟아내고야 말았다 하지 않는가. 하늘의 뜻[구름]마저 승천을 포기하고, 지상의 아랫도리를 적셔주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있는데, 지구를, 지구의 기상을, 하나뿐인 지구환경을 가장 많이 더럽히고 있는 인간들만이 반성할 줄 모른다. 인류가 언제나 개과천선하여 자연의 존재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승천을 포기한]구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한 편의 미학적 산물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감수성에 따라 다르다. 그래도 한 편의 시조에 담긴 시적 정서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때, 비를 자연이 일으키는 기상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반영임을 수용할 때,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고양된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를 씻어낼 비가 아랫도리를 흠뻑 적시도록 쏟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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