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천동 겨울밤
송천동 겨울밤
  • 전주일보
  • 승인 2021.12.2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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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시인
정성수 시인

눈이 내린다 송천동에
지난 겨울에 내렸던 눈이 옛날에도 내렸던 눈이
이 밤에 하냥하냥 내린다

송천동 밤골목에 수천수만 흰나비 떼가 
봄을 향해 날아가면
발자국을 남기고 골목을 빠져나간 그 사람은
어딘가에서 휘파람소리로 울고 있을 
이 겨울

눈이 큰 그 사람의 눈 속에 밤새 눈이 쌓이고
송천동 골목에서 밤을 지키는 
눈같은 사람의 입술 얼어붙은 지 오래다

송천동 겨울밤이 흰 이불을 펴 
세상을 덮으면
나는 눈꽃 몇 잎을 이마에 붙이고 겨울 속으로 침잠한다

 

#겨울이 좋은 것은 내리는 눈이 땅 위에 흩어진 것들이나 추한 것들을 덮어 어지럽고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하얗고, 집들도 하얗고, 거리도 하얗다. 창밖으로 보이는 수은등 불빛은 아름답다 못해 가슴이 쓰리도록 차갑게 다가온다.

하얀 세상에서는 산은 산으로, 수목은 수목으로, 강은 강으로, 물고기는 물고기로, 짐승은 짐승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정치와 제도는 물론 법이나 윤리도 필요치 않다.

자유가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삶이나 죽음이나, 번민과 슬픔이 없는 평화의 땅이다. 그 땅에서는 권모술수와 시기질투는 물론 숲을 갈아엎는 일도, 썩은 강물의 역한 냄새를 맡고 코를 움켜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명이 내뱉는 독가스도 없다.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부터 빚어지는 산물로 생각과 행동에 따라 희망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사냥꾼은 사냥을 위해 눈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농사꾼들은 농사를 위해 눈이 적당히 내리기를 바란다. 갑남을녀가 눈 오는 것을 좋아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그저 좋다. 눈이 함박눈으로 펑펑 내리면 괜히 좋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도 창 밖에 수천수만 흰나비들이 허공을 건너오는 걸 보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한밤중에 싸르륵싸르륵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 잠들지 못해 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눈은 눈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연인이자 친구다. 연인이나 친구도 오다가다 상처를 주어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내리는 눈은 그럴 일이 없어 좋다. 깊어가는 겨울밤에 푹푹 쌓여가는 눈은 바라만 봐도 마음은 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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