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까지 후련한 기쁨
속까지 후련한 기쁨
  • 전주일보
  • 승인 2021.12.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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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문 광 섭/수필가
문광섭 / 수필가

올해도 끝자락에 들어선 11월 초, ‘단풍가곡제를 치르는 한벽문화관을 찾아갔다. 해는 중천에 있고, 전주천을 휘돌아 오는 바람결이 어느새 서늘바람으로 변한 걸 실감한다.

낙엽이 또르르 굴러가는 가을이다. 옛날에 이 길을 우리는 방천길이라고 불렀다. 버드나무 잎이 다저버린 길을 걷다 보니 유서 깊은 한벽루寒碧樓가 산자락에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전주천이 유유히 흘러 그리운 시절의 정취가 떠오르게 했다.

그 옆엔 오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물고기 매운탕 집들이 예전처럼 반겼다. 발길 끊은 지 십수 년도 넘었건만, 아스라한 추억들은 금시 되살아나 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나이 탓인지 공연장에 들어서니 긴장되었다. 코로나 관계로 관객이 별로 없을 걸 알면서도 조바심마저 들었다. 아마 봄 공연 때보단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리라. 사실 난 오랫동안 여러 가지 행사 진행 관계로 무대에 오른 경험이 많아 불안해하거나 떨지 않는 편이다.

다만 나이는 속일 수 없어 노래 가사를 어쩌다 까먹는 경우가 있어서 지레 겁이 난 듯싶다. 하긴 프로들조차도 가사를 잊으면 임기응변이나 재치로 그 순간을 넘긴다는데 이 나이 든 아마추어가 실수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9회 전주 단풍 가곡제는 예정 시각에 맞춰서 시작되었다. 두 번째 출연자 순서에서다. 80 중반쯤 여성의 단독 출연인데 노부부가 함께 계단을 오르셨다. 구순 가까이 돼 보이는 멋쟁이가 부인을 부축하고 무대에 올라왔다가족 한 사람까지 거드는 거로 보아 몸이 매우 불편해 보였다.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무대 중앙에 선 노부부의 모습은 장엄해 보일 만큼 진지했다. 그동안 발표회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이 넘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시울이 젖어왔다. 더구나 노래 제목이 별빛 같은 나의 사랑이라서 감동 그 자체였다.

60여 년 다정하게 살아온 노부부가 피아노 선율에 맞춰 부르는 화음은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분이 얼마나 연습을 많이 하셨으면 그렇게 음정 박자를 척척 맞추고 아름다운 하모니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을까!

마치 백조가 율동으로 일궈내듯이 처연한 음성의 멜로디가 공연장 안에 가득 여울졌다. 해를 거듭해 아홉 번째 연 이번 단풍 가곡제는 우리 가곡동아리 회원들이 추구해온 목표와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기회였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겪던 시름도 일순간에 날려 보냈다.

이번 행사는 여느 해보다 수준 높은 기량을 선보였다. 행사를 주관했던 나 역시 무난히 마쳤다는 자부심과 함께 정말 잘하셨어요!”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마치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예전엔 무대에서 내려 올 때마다 번번이 미련이 남아 있었고, 아쉬웠었다. 그동안 올가을 공연을 위해서 1년 전부터 가사와 멜로디를 날마다 귀에 익혀왔었다. 코로나19만 아니면, 많은 가족이 참석해 우레 같은 격려 박수가 공연장을 떠나가게 했을 거라는 아쉬움 속에 2부 순서까지 무사히 마쳤다.

출연자들도 하나같이 만족스러운 표정과 상기된 얼굴이었다출연자와 가족들이 모두 떠나간 공연장 앞뜰은 어둠과 정적靜寂에 쌓였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남아서 혼자 뒤처리하는 순간에도 보람으로 벅찼고 만족감이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9년 전, 심장 대수술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고자 가곡 교실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희열喜悅을 만끽할 수 있었을까? 과연 오늘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북받쳐 올라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시작된 속까지 후련한 기쁨은 집에 돌아와서도, 자정 무렵까지 계속해 이어졌다. 또한 엊그제 찾아갔던 곱게 물든 내장산 계곡과 서래봉 단풍이 어른거리며 잠이 오질 않았는데,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이라는 생각에 밤을 새워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몸이 아프거나 숨이 차면, 노래는 고사하고 잠만 잘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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