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곡 발표회에서
어떤 가곡 발표회에서
  • 전주일보
  • 승인 2021.11.0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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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세월이 흐르고 보니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얼마나 내게 필요한 사람인지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알 것 같아요.~

남편은 88, 부인은 84인 노부부가 힘겹게 단상에 올라와 손을 꼭 잡고 서서 가곡을 불렀다. ‘별빛 같은 내 사랑이라는 제목과 가사처럼 두 분의 노래에서는 사랑이 넘쳤고 모습은 별처럼 빛났다.

그냥 감동자체였다. 참가자 가족이 대부분인 작은 공연장의 청중들 눈에는 하나같이 반짝이는 눈물이 고였고 흐르는 눈물을 슬그머니 훔치는 이도 있었다.

삶의 끝자락에선 노부부가 가곡 발표회장에 나와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는 광경, 세상을 감정없이 객관적으로만 눈으로 보아온 이 늙은 기자의 눈에서도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계단을 몇 개 올라야 하는 무대에 오를 때에도 두 분만의 힘으로 오를 수 없어서 다른 이들이 부축해서 올라왔지만, 노부부의 사랑 고백에는 힘이 넘쳤고 멜로디는 아름다웠다.

백조 한 쌍이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듯 노래는 장엄했고 한편으로 처연하여 가슴을 아리게 하면서도 그처럼 무대에 올라 손을 꼭 잡고 설 수 있는 그들의 사랑이 퍽 부러웠다.

망구(望九 :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의미로 81세를 말함)를 훨씬 넘어 망백(望百)을 가까이 둔 두 분의 노래는 한 입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리듬이 맞고 천상의 화음으로 울려 퍼졌다. 전혀 노인이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할 수 없는 노인들의 음색이었고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짧은 시간, 4분이 채 안 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갖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얼핏 보아도 멋쟁이였을 듯한 남편의 모자와 옷이 풍기는 느낌은 부인이 제법 가슴을 졸이며 살았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물론 내 오해일지 모르지만. 그러다가 나이 들어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 용서하고 보듬으며 사랑을 키우고 넓어진 마음이 하나로 되었을 듯했다.

두 분의 평소 생활이 어땠는지, 자녀는 몇이나 두었는지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가족 관계나 지난날의 자잘한 일이 지금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오랜 세월 서로 바라보면서 닮아버린 두 사람에게 건강과 사랑을 확인하는 마음이면 넉넉했을 것이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거니채고 앞장 서주는 두 분은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이고 애인이며 보호자일 터이다. 두 분은 노래가 끝날 즈음에 서로를 다시 바라보며 무사히 노래를 마친 일에 안도하고 감사하며 보듬고 어렵사리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른 참가자들이 부축하여 조심조심 무대에서 내려갔다.

오래 묵혀서 곰삭은 그들의 사랑은 아마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었고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의 경지에 머무는 듯 신비로웠다. 굳이 이름 지어 구분할 필요가 없는 하나의 사랑만 존재하는 듯 퍽 보기 좋았던 그들의 모습이 촬영한 영상처럼 뇌리에 머물러 있다.

언젠가 내게도 그런 사랑이 잠시라도 머물렀던 적이 있던가 내 삶의 기억인자를 모두 끌어내어 더듬었다. 기억 속에 남은 내 사랑은 늘 조화롭지 못했고 어긋나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다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속앓이하다 만 철모르던 시절의 짝사랑과 결코 사랑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인연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죽어 저승으로 들어갈 때 모든 생전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신화 속의 레테강을 건널 때에도 잊혀지지 않을 사랑. 아프고 어긋난 사랑, 나를 15년간 간병인으로 살게 했던 아내와 나의 가엾은 사랑도 기억 속을 휘돌아 나갔다. 이루지 못한 사랑, 완성할 수 없었고 꿰맬 수도 없었던 사랑이 노부부의 노래 속에서 튀어나와 내 가슴을 후볐다.

노인들이 노래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짐작해보고 건강도 챙기는 가곡 동아리 회원들의 발표회는 네게 큰 감동을 주었다. “나이는 잊어라!!”라는 듯 온 힘을 쏟아 가슴속을 시원하게 열어젖히는 열정과 신명이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퍽 보기 좋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도 덩달아 열정을 느끼고 동화하는 기분을 맛보는 게 늘 좋았다. 오늘 노부부의 멋진 사랑의 세레나데였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에서 얻은 감동은 우연히 강가에 갔다가 주운 보석 덩어리였다.

그들 노부부의 사랑 노래를 내년 봄에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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