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장식론이 유효한 시대로 회귀하기를…”
“젊음, 장식론이 유효한 시대로 회귀하기를…”
  • 전주일보
  • 승인 2021.10.25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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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 한 마디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홍윤숙(1925~2015 . 평북 정주)「장식론」전문

 

이 시를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친다. 하나는 늙음도 젊음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단 이것은 누구나 젊어보지 않은 늙음은 없겠지만, 늙어 본 젊음 또한 없기 때문이다. 젊음은 늙음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늙음은 젊음을 모두 겪었다는 것은 단순히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자산이다.

늙음이 주는 평안함과 완성을 향한 의연한 고요는 그 자체만으로 자연의 그것과 닮아 매우 아름다운 것임을 실감하는 나이-그런 행복을 젊음은 짐작조차 못한다. ,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을 내공이 필요하기는 하겠다.

이런 내공은 노년의 힘을 지닐 때 가능하다. 늙은 주제에 무슨 힘이 있겠느냐며, 아예 노년을 포기하는 분들이 경청해야 할 일이다. 노년에는 삼광三光-세 가지의 빛이 노년의 힘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노숙老熟이다. 삶이 완숙하게 성숙한 것을 뜻한다. 노년은 덜 익은 풋과일이 아니라, 잘 익은 가을 과일처럼 향기로움을 풍겨야 한다.

둘째는 노련老鍊이다. 솜씨나 재주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을 뜻한다. 젊어서 이루지 못한 것을 노년이 되어 비로소 이룬다. 셋째는 노장老壯이다. 이것은 노숙과 노련을 겸하면 건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삼로를 즐기는 노년의 힘을 젊음은 가질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남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려는 것때문이다. 어찌 여자만 장식을 달겠는가? 여자가 금은보화로 장식을 달려 한다면, 남자의 장식은 조금은 격이 떨어지는 장식이어서 문제다. 남자의 장식을 대표하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명함을 들겠다.

노추라거나, 노탐이라거나 하는 말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남자가 수컷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늙은 육신은 고려하지 못하고, 사자 갈기 같거나 닭 벼슬 같은 명함을 주저리주저리 얹으려는 것, 장식하려는 것처럼 꼴불견이 또 어디 있을까?

여자의 장식은 그것이 물질의 대가성에 값하기라도 하지만, 남자의 장식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허세의 깃털이어서, 참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그래서 이 시를 쓴 시인이 여류이어서 일까?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장식의 전유물이 여성이라는 선입관 때문일까? 그것만도 아닐 것이다. (진부한 말)이라고 전제를 하고 있지만, 젊은 여성에게서만 발견되고, 젊은 여성에게 해당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 때문일 것이다. “씻은 무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하는 찬사의 말은 여성 전용이다. 그 나이 또래의 남성의 됨됨이는 건아健兒라거나, 기린아麒麟兒 정도가 남자에게 주어지는 찬사다.

그래서 여성들의 씻은 무 같은 정갈함과 뛰는 생선 같은 싱싱함을 잃어가는 나이가 되면 비로소 그것을 보완하거나, 감추거나, 덮을 수 있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그 일 단계가 바로 화장이다. 한국 화장품이 이미 세계적인 명품으로 수출 효자상품이 된 지는 오래 전 일이다. 외래 화장품을 찾던 시절을 까마득한 옛날로 잊을 만큼 한국 화장품과 한국 여성들의 화장술 역시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다.

그런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하고 이 작품이 드러낸 아름다운 발견에 집중해 본다. 젊음과 늙음을 대비시키고, 이를 잃음과 장식으로 비유하면서, ‘젊음이 그 자체만으로도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발견하는 일은 소중하다. 어떤 여자들은 잃은 젊음의 자리를 장식으로 메우려 하지만, 그 장식이 젊음을 대신할 수 없는 것! 때로는 진부한 것이 가장 적확한 참일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신선하다.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젊음 하나만으로도 빛나는 장식이 되는 시대와는 거꾸로 가는 현실이 문제다. 젊은이들이 젊음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는 피폐해 가고 있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필수가 아니며, 설사 결혼은 할지라도 아이를 갖는 것은 더구나 꺼리는 풍토는 이 나라를 인구절벽으로 몰아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제는 잃어가는 젊음을 빛나게 하는 장식이 폐물[幣物: 비단, 예물, , 장신구 등]이 아니라, 스펙[specification: 구직자 사이에서 학력, 학점, 자격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된 세상이다. 더 이상 장신구가 젊음의 장식물이 아닌 세상이다. 그러고 보면 문학작품의 3대 특성인 개성, 항구성, 보편성이 장식론에서 유효할 수 있는 시대로 회귀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누가 이 장식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젊어서 늙음 부러워하는 젊은이 없듯이, 늙어서도 젊음 부러워하지 않는 늙은이로 살 수 있다면, 아니 죽을 수 있다면 이것과 비교될 더 큰 성취를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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