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맛있는 커피
최고로 맛있는 커피
  • 전주일보
  • 승인 2021.10.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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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금종/수필가
백금종/수필가

가을의 문턱인 9월 어느 날 백로 공원에 올랐다. 날씨는 무덥지만, 가을로 다가가는 공원의 모습이 조금은 애련하다. 늦봄 향기로 동산을 휘감아 주었던 밤꽃. 그 꽃 진 자리에 매달린 밤송이들이 입을 열고 옹골찬 가을을 쏟아내고 있다. 모두 세월의 바퀴를 열심히 돌린 덕분이지 싶다.

정상에 자리한 팔각정에 닿았다. 여덟 명의 노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분들은 거의 매일 10시쯤 되면 산의 지킴이처럼 모인다고 한다. 모두 백로 공원의 나무와 산새와 구름과 바람을 사랑하며 함께 웃고 즐기면서 해 동무한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인 검버섯과 주름으로 가득해도 모습만은 이곳에 사는 백로를 닮았다.

반가웠다. 몇 분 낯익은 얼굴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주먹을 맞대며 인사했다. 해괴한 인사법이다. 언제까지 계속할지 모를. 인사가 끝나자 부채까지도 건너 주며 자리를 권한다. 마음속에 살가운 정이 눈으로 보이는 듯 포근하다.

부채를 나에게 전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이라며 공원 아래로 내려간다. 난 그분과 풋낯 정도이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후 나타난 그는 양손에 냉커피 8잔을 들고 있었다. 산 아래에 있는 커피점에서 주문해 온 거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어리둥절했다. 더운 날씨에 제법 거리가 있는 커피점에 가서 주문하고 산 위로 들고 오기까지 웬만한 마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냉커피 한 잔씩 받은 노인들이 맛있게 마셨다. 날씨가 무더워서 갈증을 느끼던 터라 더욱 시원했을 테고, 산새들이 포롱거리는 속에 솔향이 은은히 흐르는 산정에서 담소하며 좋은 사람들끼리 마시는 커피이기에 더없이 맛있게 느껴졌을 법하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한 어르신이 툭 한마디를 던진다.

어디에서 이런 커피 맛이 날까? 신선이 따로 없어. 우리가 신선이지.”

손수 들고 온 분을 생각해 조금 포장된 말인듯하나 맛있다 하니 나도 맛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커피 한잔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렸다. 막혔던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코로나에 갇힌 답답한 일상사며 자녀들의 혼사, 해외 여행담에 군시절의 무용담까지 커피의 맛처럼 진하면서 구수한 인생살이 갖가지 사연들이 오랫동안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내 몸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 풀리는 듯했다.

커피의 마지막 향기가 입안에서 사라질 녘 내일을 기약하며 각자의 다남길로 돌아섰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에는 백로들의 밀어가 더욱 요란했다. 청솔 너머 하늘에 머무르던 흰 구름도 흥에 겨워 춤추듯 흘러갔다.

맛있는 커피? 맛이란 각자의 기호에 따라 천차만별. 스타벅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객이 진정한 커피 맛을 아는 것이라 한다. 그만큼 커피 진 맛을 내기도, 알기도 어렵다는 뜻일 터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가 탈레랑은 커피란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해야 한다.” 고했다.

커피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향이 입안에 오래 머물다 은근히 사라지는 것을 으뜸이라 생각할 뿐, 깊이 알지 못한다. 분위기가 부드럽고 우호적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생각을 되작거려보면 커피 맛이란 돈 내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얻어 마시는 것보다 내가 사는 커피가 더 맛이 나지 싶다. 남에게 얻어먹으면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반면 내가 나누는 데에는 부담이 적다. 그래서 더 맛이 나지 않을까?

선물도 받을 때보다 보낼 때 기쁨이 배가 되고, 사랑도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아름답다지 않던가? 그러면 나는 그간 얼마나 나누면서 살았는지? 자신 기댈 곳도 물러설 수도 없는 벼랑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빈곤을 이겨내야 했기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피면 이웃도 돌보고 주변을 살피면서 살려니 어느새 돌아갈 길을 생각한다. 얼마나 가지려고, 무엇을 이루려고? 가져갈 것 하나 없는데 움켜쥐기만 했는지 지난 세월의 옹두리로 남았다.

가까운 날에 다시 정자에 와야겠다. 거기서 육신은 삭정이처럼 사위어가고, 마음은 모래바람 부는 사막처럼 황량한 노인들에게 잠시 즐거움을 주기 위해 내 생애 최고로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고 싶다. 그러면서 탈레랑의 커피 맛만큼은 아니어도 진짜 커피 맛을 알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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