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은 날 
 기적 같은 날 
  • 전주일보
  • 승인 2021.10.0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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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선/ 수필가
최 정 선/ 수필가

 차들이 연이어 들어오고 있다. 모두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겠지. 나도 시내에 나가서 일을 보고 버스에서 내려 방금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동쪽으로 난 아파트 후문 쪽에서 들어오며 마주 바라보는,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찬란하다. 세상에 있는 온갖 물감을 다 풀어 그려놓은 장대한 한 폭의 그림이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해님도 멀고 힘든 하루를 걸어서 지친 몸을 쉬려고 마침내 저물녘엔 집으로 돌아가는가. 오늘은 유난히 노을 진 하늘길이 온통 환하다.

하루를 작별하는 저 고운 얼굴. 우리 사람도 저처럼 물들어 밝은 모습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세상의 하루를 떠나갈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덧없는 생각이다.

비바람 눈보라도 우리 사는 세상과 더불어 때때로 요동치고 엇섞이며 변하며 덧없기는 마찬가지. 다만, 하늘이 색색으로 물들며 노을 지는 아름다운 날들이 자주 찾아와 오늘인 양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고 있던 짐을 길옆에 내려두고 휴대전화를 꺼내어 멀리 노을 진 하늘을 당겨 한 장 사진을 찍는다. 사진에 담기는 노을도 여전히 아름답다. 아파트를 가로지르는 넓은 길 양쪽으로 여름내 푸르고 정정하던 가로수에도 어느덧 가을이 내려앉았다.

전에 없던 가을장마 소식과 함께 몇 날을 요란하게 천둥 번개가 치며 하늘을 울리더니 제법 많은 나뭇잎이 힘없이 바람에 날린다. 정성을 다하여 하루를 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사람들뿐인가. 삼라만상, 지상에 몸을 풀고 있는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 하루를 사는 일이 어렵고 고단하지 않은 무엇이 있는가. 

온갖 하늘을 나는 새들이나 땅에서 몸을 털고 일어나 달리며 다투며 뽐내며 어깨를 부딪고 살아가는 짐승들. 지친 몸을 쉬려고 제집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들, 모두의 세상 또한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정연하게 뒤따라 들어와 주차를 마치고 사람들이 각각의 집으로 들어간다.

돌아보면 하루하루가 아쉬움도 후회도 기쁨도 슬픔도 범벅된 일상 변함없는 나날이지만, 내일이면 다시 일어나 오늘은 결코 어제와 같은 하루가 아니기를 약속하며 새날을, 다시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것일까.

앞을 분별할 수 없는 병고의 세상이 끝나지 않고 있다.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라도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위대한 힘이 있어 이 어려운 시대의 불운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자못 두렵기까지 하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내일을 견디면…, 짐짓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손꼽아보는 하루가 이제는 한 해 두 해를 가볍게 넘으려 하고 있다. 반기며 살아가야 할 이웃들이 만나 손잡고 인사를 나누지 못한 채 지나쳐 가다 보면 다만, 뒤돌아보며 안타까움을 달랠 뿐이다.

병세가 과연 누구를, 무엇을 바라고 벼르고 있는지. 천년토록 우리와 함께 유숙하며 너랑 나랑 살려는 작정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비록 사소하거나 아주 긴요한 약속도 아무렴, 허락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말하면 안 되고, 먹으면 안 되고 모이면 안 된다. 아빠도 엄마도, 늙으신 부모님도 어린 아기도 가리지 않는다. 마음 한 번 잘못 먹고 저가 내놓은 계율을 어길 양이면 단번에 몸 안에 스며들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요절을 낼 것이라고. 끝내 저 뜻대로 하고야 말겠다고 우리 마음 저 밑바닥까지 잡아 흔들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다고 굽은 어깨를 펼까 하면 어느 사이 수백 수천 명을 헤아리는 이들이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병원도 의사도 간호원도 이제는 지칠대로 지쳤다는 우울한 하소연이 들릴 때면, 넋이 나갈 지경이다.

대책 없고 속절없는 날들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지금은 달리 더 할 무슨 방도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이 어두운 날들. 그냥 멍하니 서러워지는 날들. 병원에 누워 있는 아픈 이들을 찾아가 마음 놓고 얼굴을 마주할 수도, 한마디 말도 건넬 수 없으니 만일에 이들이 영영 가족도 친구도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면 세상에 이런 참담한 일이 있는가.

언제까지 바라만 볼 것인가. 죽도록 그리워만 할 것인가. 하여도 언젠가는 우리 서로 그립다 생각나면 그리운 생각, 그립다는 말 그대로 가지고 달려가 마음 놓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변치 않고 몇 날이고 몇 년이고 기다리는 이가 거기 아직 살아있고, 기다려 주는 이가 여기 있다는 따뜻한 마음을 굳게 믿고 간직할 일이다. 기적같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와중에 내 무사한 나날이 놀랍고 다행스럽다, 마음 놓이다가도 제풀에 한쪽 어깨가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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