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는 짝을 잃은 시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짝을 잃은 시인이 될 것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09.27 16: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는

몇 십 년이나 될까

내 가슴에 집을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칼날의 날개를 펴

둥지를 떠나고 말았다

 

빈 집은

바람이 부는 날

울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새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네.

 

-황금찬(1918~2017. 강원 속초)「새」전문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새를 품고 산다. 그 새가 내 가슴에 둥지를 틀고 나와 반려伴侶하는 동안은 그래도 살아 있음의 이유라도 있다. 그러나 그 새가 어느 날 칼날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린다면, 그런 날부터 내 가슴은 빈집이 될 것이다.

새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바로 자유의 이미지다. 날개를 지닌 존재는 정신의 승화를 상징한다. 칼 융에 의하면 새는 정신 혹은 천사, 초자연적인 도움, 사고, 환상적 비상을 나타내는 이로운 짐승으로 규정한다. 새를 영혼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몽골에서 행해지는 조장鳥葬은 주검을 낱낱이 분해하여 독수리의 밥으로 제공한다. 바로 그 새[독수리]가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사자를 천국으로 안내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새가 불길한 예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까치의 울음소리는 복음의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불길한 사고의 예고편이 되기도 한다. 김광섭의성북동 비둘기에서는 변두리로 쫓겨난 소시민을 상징하기도 하였듯이, 새가 항상 신성한 신의 메신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는 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구원久遠한 동경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일찍이 그런 새를 가슴에 길렀다. 내가 기른 새, 내 가슴에 둥지를 튼 새그 새는 날아갔다고 생각하다가, 근래 다시 내 가슴에 그 새가 둥지를 트는 걸 가만두었다. 가만두어도 칼날 날개를 달면 날아가면서 내 가슴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그렇게 새가 날아가며 낸 상처는 또 다른 새를 기르며 치유되기도 하는 걸, 평생 되풀이하고 있는 모양새다.

나를 구속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임을 알기까지 참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 누구도 나를 붙잡지 않는다. ‘붙잡는다는 것은 구속한다는 것인데,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얼마든지 새처럼 날개를 달고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를 내 스스로 자초한 부자유의 변으로 일찍이 마련해 둔 터다.

내 영혼을 내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겼다. 생각해 보니 영혼-영적 존재-靈感이 단 한 번도 내 몸과 별개로 작동한 적이 없다. 모든 영은 육의 부산물이거나, 아니면 육과 연동되어 느껴지곤 하였다. 가깝거나 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부음을 들을 때 내 가슴에서 새소리를 내는 영이 활발히 몸에게 자극하는 걸 느끼곤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내 가슴 안의 새는 부단히 영적 존재의 거처를 몸에서 분리하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왜냐하면 육의 소멸과 함께 영이 소멸된다는 것을 너무도 뚜렷이, 날마다 겪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사례는 나를 영육일체영육분리의 틈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하나는 열세 살 때 자식 곁을 떠나가신 어머니의 영혼을 아무리 불러도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 하나는 필자 주변에서 상처하신 분들의 망부가望婦歌를 듣는 일이다. 아내를 잃고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건만, 아내가 가슴에서 우는 새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신성한 어떤 날갯짓이 있는가, 이를테면 외롭거나 쓸쓸할 때, 절망스럽거나 허무할 때 내 안을 관통하는 어떤 신성한 기운 같은 것을, 새의 날갯짓 같은 것을 기대해 보지만, 그런 행운은 쉽게 오지 않았다. 처절한 몸살의 흔적을 남기고 스스로 창조주의 분신임을 자각할 수 있는 동안만 나는 신성해지는, 불경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내 안의 새는 나를 참 무력하게 한다. 그것이 욕망과 비슷한 길을 비행하곤 해서 나를 곤혹스럽게 하곤 한다. 만년설이 쌓인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철새라도 기르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나 욕망의 그물에 갇혀 나를 방황케 하는 내 안의 고장 난 나침반이 되곤 하는 새, 그래서 나도 내 가슴 안의 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새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네.”

칼날 날개를 펴 둥지를 떠난 새를 찾아 바람 부는 날이면 울고 있을, 빈집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짝을 잃은 외기러기일까, 아니면 몸[육체]마저 비우고 맘[영혼]만의 존재로 승화된 시인일까? 누가 되었든 우리는 언젠가는 짝을 잃은 시인이 되고야 말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