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심미안을 담아내는 시조의 매력”
“겨레의 심미안을 담아내는 시조의 매력”
  • 전주일보
  • 승인 2021.09.1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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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심미안을 담아내는 시조의 매력

 

날렵 잘록 허리선을

무심으로 그려가자

 

푸른 하늘 두리둥실

구름으로 흘러가자

 

내 인생,

술잔 가득히

시절인연 흔들리자

 

-정기영(1958~ 전북 부안)청자구름무늬 술병전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시조의 멋과 맛에 취하게 될 것이다. 비록 문학에 관심이 없거나, 시가 무어냐며 대수롭지 않게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거나 들려오는 시조 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흠뻑 취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시조의 매력이다. 그러니 우리 겨레의 유전자에는 시조의 리듬감이 생태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시조는 친근하고 고유한 운문문학의 정수다.

 

더구나 시조에 얽힌 역사적 맥락이나, 시조의 뒤안길에 맺힌 일화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시조가 문학 이전에 역사를 반증하는 산물이며, 고사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의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이게 바로 시조의 매력이다. 이를테면 이방원이 정몽주를 청한 자리에서 몇 차례 술잔이 오간 뒤, “제가 시를 한 수 읊을 테니 답가를 해 주시겠습니까?”라며, <하여가>를 읊었다. 그러자 이 시를 들은 정몽주 역시 <단심가>를 불러 자신의 단호한 충정을 전한다. 죽어서도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하겠다며, 고려에 대한 충심을 드러냈다.

 

그 어떤 역사적 실록보다 이 두 편의 시조가 역성혁명의 참상과 전개 과정을 생생히 들려주는 데 손색이 없다. 역사도 곧 사람의 일이라면,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겠다는 세력과 역사의 정통성을 죽음으로 지켜내겠다는 올곧은 충정이 부딪치고 있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듯하다. 이런 시조를 대할 때마다 우리 겨레에 내재한 운문문학의 유전자가 발동하는 것을 실감한다.

 

이렇게 피를 튀기며 전개되는 역사의 부침만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다. 미묘하고 곡진한 사랑의 정서를 주고받는데도 시조만 한 미학적 도구가 따로 없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작품은 차고 넘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진이와 서경덕이 벌인 사랑의 줄다리기를 담은 시조와, “북천이 맑다커늘로 시작하는 임제의 시조와 이에 화답하는 한우라는 기생의 [어이 얼어자리]로 시작하는 <한우가>에는 고답한 에로티시즘이 듣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그러고 보면 시조는 단순히 운문문학이라는 장르적 성격을 뛰어넘어 삶의 시난고난[喜怒哀樂]까지도 노래로 풀어내는 서정문학의 뿌리였다. 나아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겼던 고급한 정신문화의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기영의 시조청자구름무늬 술병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네 삶을 고양시키는 멋의 여유랄까, 혹은 사물에 담긴 미학적 요소까지도 불러내어 즐길 줄 알았던, 생활인의 심미안까지 엿보게 한다. 이런 시조가 탄생한 비밀 아닌 비밀을 알 것도 같다. 모든 미학적 산물은 체험의 범주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안은 왕실 도자기를 굽는 도요[陶窯-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던 곳이다. 이런 전통을 잇느라 <부안청자박물관>을 세워서 운영한다. 정기영 시인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며 청자박물관의 지킴이 노릇을 하는 향토시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시물에 눈길이 가고, 마음결이 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눈길이 시안詩眼으로 고양되었을 것이고, 그런 마음결이 시심詩心으로 승화되어, 이렇게 고아한 풍취를 자아내는 시조가 탄생했을 것이다.

 

평시조 한 수는 3645자 내외라는 매우 간결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처럼 담을 것은 모두 담을 수 있는 형식미를 자랑한다. 여기에 말맛을 살려내는 감칠맛은 덤으로 따라온다. 이 작품은 이런 시조의 매력을 예로 보이기에 적절하다.

 

초장 날렵 잘록 허리선을/ 무심으로 그려가자에는 <청자구름무늬 술병>의 외형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청자의 부드러운 곡선에 담긴 예술미의 정수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를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가짐[無心]까지 함께 드러낸다. 중장 푸른 하늘 두리둥실/ 구름으로 흘러가자에는 술병에 그려진 그림이면서 동시에 시적 화자가 품고 있을 자연 친화적 지향성, 즉 전원으로 귀거래하려는 마음결까지도 함축해 낸다. 종장 내 인생/ 술잔 가득히/ 시절인연 흔들리자는 초중장에서 불러일으킨 시적 흥취를 결구하는 대목이다. 술병이 있다면 반드시 술잔도 있어야 하며, 이를 음미할 사람도 따라야 한다. 시조의 간결미는 이를 동시에 함축한다. 실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실체까지도 담아내는 매력이다.

 

끝으로 이 작품이 지닌 운율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조의 리듬감은 주로 음수율에 의존한다. 이 작품은 그려가자-흘러가자-흔들리자를 각 장의 끝에 배치함으로써 음성율과 음위율까지도 동시에 살려냄으로써 한 편의 평시조를 읽고 나면,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이 <청자구름무늬 술병>의 술을 마신 것 같은, 즐거운 취흥에 사로잡힌다. 이 시조의 놓칠 수 없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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