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이 어짊에 이르는 길”
“어리석음이 어짊에 이르는 길”
  • 전주일보
  • 승인 2021.09.0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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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커다랗게 뜬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서 내가 있고나.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그시 눈을 감은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구나.

 

-김종길(1926~2017. 경북 안동)「소」전문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거나, 제 눈에 안경인지는 몰라도 짐승이나 가축은 그들이 서식하는 공간이나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정이나 생김새를 닮는 것이 아닌가, 의아할 때가 있다. 한우, 특히 농우를 바라보노라면 그 순하디순한 생김새 하며, 주인의 말에 절대복종하며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영락없이 법 없이도 살만한 사람의 성정과 모습을 연상케 하며, 나아가서 우리 겨레의 성정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모습을 과장이나 극적 장치 없이 여실히 드러낸 영화가 바로 <워낭소리>. 이 작품은 빼어난 영상미와 함께 한국 정서를 형상화한 점도 탁월하지만, 짐승인 누렁소와 동고동락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일품이다. 이 작품에는 소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가축인 소를 돌보는 것인지, 아니면 늙고 쇠약해진 가축 누렁소가 할아버지를 돌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하긴 이런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사람됨의 못된 버릇이라도 되는 양, 할아버지는 소를 가족으로 생각하며, 소 역시 할아버지에 의지해서 여생을 마감해 가는 과정이 사람과 가축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편협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우리나라 전통 한우는 누렁이다. ‘황소라 하면 사람들이 흔히 누런 빛깔의 소를 연상하지만 실은 수소를 뜻하는 말이다. 황소라고 할 때의 은 누렇다는 뜻이 아니라, ‘크다라는 뜻을 가진 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황소는 검은 소건 흰 소건 덩치가 큰 수소를 모두 황소라 부를 수 있다.(Daum.백과)

박목월 시, 손대업 작곡(1948)의 동요 <얼룩송아지>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창되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그러자 일부에서는 우리네 전통 한우는 누렁인데 어찌 수입 젖소인 얼룩소를 노래하느냐고 탓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엄마 소도 누렁 소 엄마 닮았네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였으며, 실제로 그렇게 고쳐서 부르는 동요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또 누렁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있는 소가 본래 우리나라 전통 한우라며 <얼룩송아지>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경주에 있는 박목월 노래비에는 <얼룩송아지>가 원작 그대로 새겨져 있다. 어떻든 소는 우리 겨레의 삶과 밀접하다.

이런 소가 어리석다고 보는 사람이라도 있을 것인지, 소의 표정을 그윽이 바라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부쩍 든다. 모든 가축이 대부분 그렇게 여생을 마치지만 특히 소는 농경민족인 우리네 삶과 뗄 수 없는 가축이다. 그래서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꾀바르지 못한 사람을 일컬어 지청구할 때 소처럼 미련하다고 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재주껏 얍삽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때로는 미련퉁이로 사는 것이 소만큼은 아니어도 주어진 운명에 커다란 흠결을 내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기도 했다.

난득호도難得糊塗란 말이 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가훈으로 꼽는다. “어리석게 사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뜻 정도이다. ‘호도糊塗란 말의 원래 뜻은 어떤 일을 일시적으로 발라맞추어 속이거나 감추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됨됨이를 감추거나 속이면서 남에게 어리석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니, 그게 얼마나 어려울까? 중국인들이 아니어도 짐작할 만하다. 소처럼 미련하다는 지청구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삶, 이게 아무에게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에서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는 구절에서 그런 생각과 만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를테면 모두가 저만 잘났다고 으스댈 때, 모두가 저만 살겠다고 앞장서려 할 때, 모두가 앞만 바라보며 질주할 때……, 그래, 나보다 당신이 잘났다!, 그래, 나보다 너 먼저 잘 살아라! 그래, 나는 꼴찌라도 좋으니 너부터 앞장서라! 그래, 너는 앞을 보고 달려라, 나는 옆도 뒤도 돌라보며 서나서나 가겠다고 선언하는 게 바로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난득호도가 아닌가!

이렇게 살기가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이 시의 화자는 그런 삶이 지혜로움이며, 이 슬기로움이 바로 어진 것[仁慈-博愛-慈悲]’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며 지그시 눈을 감는 버릇을 들였다고 했다. 명상은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다. 소를 통해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는 바로 스스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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