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바라보는 동심과 어른의 시각차”
“죽음을 바라보는 동심과 어른의 시각차”
  • 전주일보
  • 승인 2021.08.2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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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바라보는 동심과 어른의 시각차

 

아저씨,

천사되어 날아갈래

,

무거워서 떨어져.

그럼, 구름 언저리쯤만

날아갔다 깊은 산

안개 속에 떨어지지, .

 

그 후 소녀는 떠나면서 엽서 한 장

없는 텅 빈 하늘로 날아가고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곡선으로 내리는 눈송이처럼

휘청거리고 있다 휘청거리고 있다.

 

-김춘추(1944~ 경남 남해)「천사」전문

동심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처음 마음이다. “애들 말 듣고 배따랴?”라는 위험도 있지만, 그 확신할 수 없는, 불안정하고 불확정한 상태마저도 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할 법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언어는 어른의 눈높이가 아니라, 바로 아이들의 눈높이로 보고 들어야 성인의 언어체계로 바로 설 수 있다.

어톤먼트Atonement란 영화가 있다. 영국 작가 이언 매규언의 베스트셀러 소설 ' Atonement[속죄]'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61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8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서 소설가를 꿈꾸는 열세 살 어린아이의 상상력과 혼자만의 사랑으로 언니가 사랑하는 남자를 곤경에 빠뜨려 마침내 두 사람은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어린아이의 비뚤어진 판단[증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은 따로 있다고 봤다. 어린이의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언어와 심리만이 주목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악마성은 인간에게 잠재된 본성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영악함[악마성]이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어린아이의 언어체계를 어른[성인]들이 놓치고 있는 데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애들 말 듣고 배를 딴성인들의 악마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생은 성장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언니와 언니의 남친을 향한 속죄-atonement'를 지향하지만, 이마저도 속죄해 줄 대상이 사라진 뒤의 일이다.

이 시천사를 쓴 김춘추 시인은 혈액암 전문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암은 사망 원인 1위인지 오래전 일이다. 그 무서운 암은 종류도 많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이 작품에서 시적 대상으로 읽히는 소녀도 아마 불치의 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끝내 저세상으로 떠난 듯하다. 아니면 불치의 병이 아닐지라도 요즈음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하는 학교폭력이나 불가항력적인 외세 혹은 성장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세상을 택한 아이일 수도 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이건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스스로 천사가 되겠다는 선언은 같은 죽음이라도 동심다운 발상으로 대하는 이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황을 앞에서 언급한 <Atonement>에 미루어 보니 동심의 실상을 알겠다. 시적 대상으로 언급된 소녀는 죽음을 천사가 되어 날아가는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를 듣는 시적 화자는 죽음을 통해서 휘청거리는번뇌에 빠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 번뇌의 핵심이 무엇일까? “크리스마스이브에 곡선으로 내리는 눈송이가 말해 주는 듯하다. [신은 왜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생명을 저리 일찍 거두어가려 하는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자신의 독생자를 내려보내신 이유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화자는 고뇌로 인하여 휘청거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신이 저 어린 생명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인간의 육신을 구원한다는 의사란 존재 의미에 대한 번뇌도 함께 작용하고 있으리라. 죄를 짓기에는 아직 세상을 많이 살지 못한 어린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신 다음으로, 의사인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스스로 탓하는 것은 아닐지, 주제넘은 발상이지만 휘청거리고 있는 시적 화자의 심정을 어른[성인]의 언어로 미루어 볼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매우 평등한 모양이다. 죄가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적건 죽음은 이를 가릴 마음이 없거나 능력이 없나 보다. 그러니 죄를 짓기에는 너무도 어린 소녀도 마침내 엽서 한 장/ 없는 텅 빈 하늘로 날아가고말지 않았는지.

일전에 외국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한 기사를 봤다. 유치원 선생님이 원생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것이라고. 이에 한 아이가 큰소리로 기도했다. “하느님, 저에게 죄를 짓게 해주세요. 그래야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할 수 있어요!”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동심에서 우러나온 어린이의 언어[사고]이고, [비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처럼]-휘청거리고 또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이것이 바로 어른의 언어[사고]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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