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속에 돋아나는 그리움으로
빗방울 속에 돋아나는 그리움으로
  • 김규원
  • 승인 2021.08.12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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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숙/수필가
김 영 숙/수필가

하늘이 숨겨둔 그리움의 둑이 터졌을까? 구름이 눈물을 잔뜩 품고 다니더니 시도 때도 없이 마음 가는 곳에 쏟아낸다. 때로는 그 눈물이 과해서 여기저기 생채기를 내거나 황토물로 넘실거리며 강으로 흘러가지만,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해맑다.

어쩌면 그것이 그리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아닐까? 그래서 강은 물이 넘쳐나도 너그럽게 보듬어주고, 들꽃들은 빗줄기에 호되게 얻어맞고도 여전히 튼튼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지켜낸다. 오히려 장마 뒤에 내리쬘 뙤약볕을 견뎌내기 위한 몸보신이라도 하는 양 빗물을 온몸으로 받아 머금는다.

이런 날이면, 나 또한 내리는 비만큼이나 넉넉한 마음 펼쳐놓고 원 없이 그리워할 수 있어 마냥 심란하지는 않다. 기억은 머나먼 세월을 건너 추억의 한 고개를 넘어 산 넘고 물 건너 왕복 이십 리 길을 걸어 다니던 산골 소녀의 초등학교 시절 흑백 영상으로 출렁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이니까 아마 45년은 족히 지난 장마철 기억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식구들은 큰아버지 기일에 맞춰 서울 나들이를 하는데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어머니는 꽃고무신을 사서 서울 갈 때 신자며 시렁에 가지런히 올려놓으셨다.

나는 방학하면 친구들에게 새 신발을 자랑 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엄마 몰래 신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 가는 십리 길에는 크고 작은 도랑이 많다. 도랑은 대부분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어 비가 내리면 징검다리가 불어난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갔다.

그날은 비록 다리가 물에 잠기긴 했지만, 물살이 세지 않아서 쉽게 건널 수 있는 정도였는데 내가 발을 헛디뎌서 그만 들고 있던 신발 한 짝을 놓쳐버렸다. 나는 그 신발을 잡으려다가 넘어져서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물 밖의 아이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고 순간적으로 물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용감한 선배가 첨벙첨벙 물에 뛰어 들어와 떠내려가는 나를 붙잡아 간신히 물 밖으로 끌어냈다. 했지만, 내 고무신 한 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집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어머니는 그까짓 신발이야 다시 사면 되는 것이니,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다.' 하시며 다독여주셨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나왔더니 꽃고무신 한 켤레가 다소곳이 마루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날 구해줬던 그 선배가 하굣길에 혹시나 하고 아침에 사달이 났던 근처를 둘러보았더니 다행히 신발이 떠내려가다가 수초에 걸려있어서 가져왔단다. 어머니는 가가 네 은인이여!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왕지사 이렇게 됐으니 신고 다니거라!” 하셨지만 나는 새 신발은 서울 나들이 때까지 시렁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산이 서너 번 바뀔 만큼 지났지만 괜찮다 살았으니 다행이다.” 라고 다독여주시던 어머니의 투박한 사랑이 여전히 그립고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그 흔한 썸 한 번 타 본 적 없는 내 생명의 은인 또한 내 가슴에 남아 이런 철이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장마철이 되면 덩그러니 내 기억의 언덕 하나 만들어놓고 그리움의 나무도 가꾸고 추억의 숲도 무성해진다.

올해는 유난히 장마가 짧았지만, 결코 비가 적게 내린 것은 아니다. 국지성 폭우로 여기저기서 애써 가꾼 농작물을 쓸어갔다느니 도로가 끊기고 평생 일군 삶의 터전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예년이나 다름없다. 아울러 그 안타까운 수해 현장을 돕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봉사자들의 소식 또한 훈훈하게 들려온다. 그렇게 아픔을 나누며 함께 가는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상념의 끝에는 물에 빠진 산골 소녀를 끌어내 주고, 잃어버린 꽃고무신을 찾아주었던 내 생명의 은인이 있다.

나는 결단코 은인을 잊은 적이 없었지만, 은혜를 갚지 못했고 고맙다는 뜻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외려 장마철이면 만만하게 불러내서 추억으로 포장해 우려먹으며 스산한 마음을 다독이는 갈피로 삼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를 핑계로 밤을 뒤척이는 강물에서 흐린 기억 어디쯤 유기되었으나 매장되지 않은 추억 한 조각 찾아낸다. 그가 아직도 풋풋한 소년으로 내 가슴에 살아 있는 동안 나도 꽃고무신을 그리워하는 어린 소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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