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그늘
풀 그늘
  • 김규원
  • 승인 2021.07.2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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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최 정 선/수필가
최 정 선/수필가

더워도 더워도 이렇게 더울까. 온몸에 불을 끼얹듯 한다.

얼마 전까지도 이런 더위를 겪은 적 없었건만, 이제는 아예 길게 눌러앉을 모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로 몸을 식히며 나날을 겨우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더위도 제자리를 잡으려면 어느 만큼 체적과 체력이 필요할 텐데 빈한한 내 몸으로도 견디기가 힘들다. 웬만하면 더위를 크게 탓하지 않고도 지금껏 나는 여름을 수월하게 살아온 터였다.

더구나 일찍이 보고 들은 적 없는 전염병까지 마치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휩쓸고 있어, 문밖출입마저 머뭇머뭇 기웃거리게 되었다. 어쩌면 주인은 저리 가라 하고 손님이 대신 주인이 된 세상을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잠시라도 산과 바다를 찾아 활기찬 여름날의 낭만을 한껏 환호하지도 못하고 우울하고 안타까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더위와 병마에 손발은커녕 아예 몸도 마음도 꽁꽁 묶인 처지가 되었다.

오래전, 딱히 요즘 같지는 않았지만, 무더위가 심한 어느 여름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용 든 약을 지어 들고 내 집에 오셨다. 전주에서 대구까지 기차를 타고도 시간이 오래 걸리던 때였다. 대구로 오는 기차가 처음이셨으니 많이 낯설기도 하셨을 것이다. 내가 결혼하고 두어 해가 지나도록 나 사는 양을 보지 못하고 염려하시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원찮은 내 건강이 늘 어머니 마음을 무겁게 해 드린 것이다. 오시기 전, 한의원을 찾아가 상의했노라고 하셨다. 몸이 차고 마른 체질에는 용 든 약보다 더한 약이 없다고 권했다고 하셨다. 지금도 이른바 보약을 지으려면 상당한 비용을 치러야 하지만 당시에 첩약을 마련하신 비용이 얼마나 되었는지, 어떻게 마련하셨는지 말씀도 미처 여쭙지 못했다.

어머니는 약을 정성껏 달여 마시라고 내게 신신당부하셨다. 정성을 다해야 보약이 된다고 거듭거듭 이르시고 돌아가셨다. 혹독한 더위에 멀고 낯선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어머니의 정성이 내게 닿았던지. 그 후로 나는 기적과 같이 어머니가 지어다 주신 약을 먹고 별 탈 없이 큰애를 출산하였고, 아래로 건강한 두 아이를 얻게 되었다.

오로지 내 살림 차리느라 가실 때에도 어머니께 따로 얼마간의 용돈마저 준비해드리지 못했던 일은 또 어찌하랴. 다시 대구에서 전주로 가시던 날이었다. 타고 가시던 기차를 호남선과 전라선의 분기점인 이리역에서 갈아타야 할 것을 잊고 그만 전주가 아닌 정읍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셨다. 말씀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셨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찌어찌 물어서 무사히 전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 말씀을 들었으나 어머니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큰일이 아닌가. 덩달아 놀란 가슴 두근거리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큰 오빠께서도 넉넉지 못한 살림에 우리 동생들과 자신의 아이들까지 여러 식구생계를 혼자 짐 지고 고생하시던 중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수중에 지닌 용돈조차 넉넉하지 못했을 어머니 처지를 짐작하여 울컥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는 어머니도,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도 의연히 고생을 감당하시던 큰오빠도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나도 다시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이런저런 어머니 생각이 밀려들 때면 가까운 곳에 있는 선산으로 향한다. 고조와 증조, 아버지와 큰오빠, 어머니를 앞서 가장 먼저, 가장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은 오빠를 그리도 잊지 못하고 눈물겹게 생각하시던 어머니가 그곳에 함께 계신다. 눈 아래 두 아들의 처소가 그윽이 바라보이는 곳에 누워 어머니도 작은오빠도 지금은 평안하실 것이다.

때때로 찾아가 엎드려 절하고 다만, 살아계실 때 내 무심함과 어리석음을 헤아려 한숨지으며 후회하고 한탄할 뿐이다.

무덤 위에 풀들은 유난히 잘 자라는 것일까. 불볕더위도 제 일 아닌 듯 외면하고 한여름을 무성하게 자란다. - 저대로 키만큼 자란 풀 그늘 져서 무덤 안 더위도 조금 가라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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