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움, 타인마저도 ‘나 아닌 나’일 때 가능하다.”
“사람다움, 타인마저도 ‘나 아닌 나’일 때 가능하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07.1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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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 타인마저도 나 아닌 나일 때 가능하다.”

 

비 내린 뒤

앞산 능선은 눈부시다

 

깨끗이 옷 갈아입고

출타준비 마친, 아침 숲

 

어제만 해도 눈감고

아무 생각 없는가, 했더니

무리지어 합창하는 백합꽃

 

텃밭에는 가지 오이 고추가

서로 다투어 키 재기에 바쁘고

마늘과 양파도 선반에서 잠든 지 오래

 

그런데 나는, 나 아닌 나 때문에

잠 못 이루나, 비는 내렸는데

 

-이성자(1945~ 전북 부안)「비 내린 뒤」전문

 

비 내린 뒤 맑게 갠 풍경이 수채화 물감으로 풀어낸 듯하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대부분 잊고 살지만, 눈 밝고 마음 밝은 시인의 안목[詩眼]만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비 내린 뒤맞이하는 풍경이 오롯이 우리 마음 안에 맑기만 한 생각의 뜰을 펼쳐놓는다. 이런 마음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이라면, 결코 군림하려 드는 세월의 횡포 앞에 호락호락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시로 말하기의 어법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온건하면서도 다감하기만 한 서정적 자아의 심성이랄까, 깊은 사색의 결과를 티 내지 않고 고뇌하는 모습이랄까, 그도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자꾸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놓는 자연의 상도가 일상으로 펼쳐진다. 표현 뒤에 아껴둔 엄청 많은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말하는 이의 성정이 보이고, 시적 화자의 연치가 읽히며, 서정적 자아가 지향하는 삶의 궁극적인 길이 보이는 듯하다. 그럴 만큼 과장하지 않은 고뇌의 농도 역시 일상을 사색의 깊이로 끌어들이며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밝은 소식에 기뻐하며, 궂긴 소식에 슬퍼하는 것. 좋은 일에 즐거워하며, 나쁜 일에 아파하는 것.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과 항상 동반한다. 그럴지라도 서정적으로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기쁨 안에서 슬픔을 건져내기도 하고, 슬픔 안에서 기쁨을 다독일 줄 안다. 즐거움 속에서 아픔을 기억해 내고, 아픔 가운데 즐거움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 맥락이 가능한 것은 서정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시적으로 세계와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있을 법하다. 이 작품은 그렇게 관조하는 시인이 보인다.

오복을 모두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매일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오복은커녕 조석거리가 궁색한 사람에게도 매일 웃음거리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게 인생이다.

이를테면 비가 갠 뒤 앞산 능선을 바라보라. 아무리 안에서 투쟁하느라 벌건 불길이 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이는 입가의 미소를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월요병에 걸린 현대인이라고 치자. 오뉴월이 장마마저 거뜬히 물리친 뒤, 비가 갠 초여름의 앞산 능선을 바라보라. “깨끗이 옷 갈아입고/ 출타준비 마친건강한 생활인을 떠올리면서 월요병의 두통마저 말끔히 지우고 말 것이다.

그런데 출근하는 것은 정작 월요병의 현대인이 아니라, 바로 이라 했다. 그것도 아침 숲이라 했다. 혼탁하기만 한 우리 세상에 숲이 말끔한 차림으로 출근을 한다면 얼마나 맑고 청명한 세계를 이룰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훤히 뚫리는 듯하다. 시적 화자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음에 틀림없다. 날마다 공기 오염상태와 미세먼지 분포도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세상에 비 내린 뒤의 아침 숲이 출근한다는 설정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오뉴월이 지나고, 칠월을 목전에 두는 계절감을 아시는가? 백합꽃, 접시꽃, 장미꽃, 금계국 등 온갖 여름 꽃들이 지천을 이루는 때다. 시적 화자의 뜰에는 마침 백합을 심어두고 여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눈 감고 아무 생각 없는듯하던 백합이 일제히 합창을 한다. 백합꽃의 향기[후각 이미지]가 얼마나 진동했으면 일제히 목소리를 모아서 합창[청각 이미지]로 피어나고 있을까, 비가 갠 뒤 시인의 뜰이 궁금하긴 궁금하다.

꽃만이 아니다. 비가 내린 뒤라서, 가지며 오이, 호박이며 고추 등 여름 채소가 키 자랑을 하는 것도 예쁘기만 하고, 선반에는 이미 거둬들인 마늘이며 양파 등 땀의 결실이 고운 잠을 자는 것 또한 보람이기만 하다. 비가 내린 뒤가 아닌가!

그럴지라도 기쁜 일 안에 궂긴 소식 있으며, 궂긴 일 안에 기쁜 소식 있다 했다. 그래서 인생이라 하지 않았는가! 비 갠 뒤에 맞이한 삶의 청량감은 나 아닌 나 때문에/ 잠 못 드는시간의 반영임을 알겠다. J.P.싸르트르는 지옥은 곧 타인이라고 했지만, 이 시의 화자처럼 혈육만이 아니라 타인마저도 나 아닌 나라는 인식으로 다가갈 때, 비로소 사람다움이 가능할 법하다. 비 갠 뒤의 청량한 아침 숲마저도 나 아닌 나가 있어 가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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