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로 읊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정신”
“시조로 읊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정신”
  • 전주일보
  • 승인 2021.07.0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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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로 읊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정신

 

양파는 벗길수록 뽀얗게 내밀더니

톡 쏘는 먹이 만나 눈이슬 맺혔던가

티브이 속 잠자던 뉴스 눈꺼풀을 씻는가

긴 칼 찬 먹물신사 헛웃음 마구잡이

먹 기사 빌어먹고 패거리 떠들더니

헛발질 공차기하다 사실무근 외치는가

흰 종이 붉은 글씨 싸인 펜 아리송해

공치사 허위사실 망신살 뻗쳤으니

먹물에 기레기 훈장 가슴깊이 새겼는가

 

-조명환(1950~ 전북 부안)색안경을 벗어라전문

세 수의 평시조를 담은 연시조다. 시조라면 대부분 사람에게는 우리나라 전통의 정서를 담아내는, 고유한 정형시라는 개념이 확립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옛시조가 그렇듯이, 음풍농월[吟風弄月-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시로 노래하며 즐김]을 일삼는 선비들의 여흥 꺼리로 여기기 쉽다. 옛시조가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만, 시조도 서정시의 한 갈래라고 본다면 그런 취향이 시조의 격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랄 수는 없다.

그래서 시조에는 현대 서정시와는 다른 결과 맥을 지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형시로서 시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실정과 잘 어울리는 형식이다. 먼저 우리말의 어휘들이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에다 조사를 붙이면 3자 내지 4자의 시어를 만드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 용언[동사, 형용사]도 마찬가지다 어미를 활용하면 시조의 율격에 어울리는 시어를 부리기에 알맞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잘 어울리는 형식이다. 우리 민요나 전통 가요의 노랫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런 요소들이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시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형시로 든든히 자리매김 되어 왔다.

옛시조와 달리 현대시조에서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발전적 변화를 기하는 것도 한 특징이다. 고유한 평시조의 율격인 3645자 내외라는 틀을 반드시 고수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로서 내적 필연성과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기본 율격을 융통성 있게 구사하는 것 또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현대시조는 전통적인 정형시의 율격을 지키면서도 오늘의 정서를 담아내는 데 독특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이 작품만 해도 그렇다. 조명환 시조 시인은 시조집을 세 권이나 상재한 중견 시인으로서 오로지 시조 창작에 몰두하는 은둔의 가객이다. 이 작품은 3장의 평시조를 연 구별 없이 붙여 씀으로써 외형상으로 자유시다움을 지향하고 있다. 언뜻 첫눈으로 보기에 시조다움을 떨치고 자유시다움을 취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서정 공간을 스스로 확립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무난한 접근이다.

외형상으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제재와 내용에서도 음풍농월이 아니라 첨예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조의 제재로 다루기에는 조금 낯설다고 여길 만하지만, 당대를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시인으로 어떻게 이 시대의 최고 관심 사항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는 근래 우리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분노케 하였으며, 나아가 공정사회와 법치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게 하는 내용들이 정형시의 온건한 틀 속에서 용틀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소불위한 검찰 권력의 민낯과 권력의 하수인이자 나팔수로 전락한 언론과 기자들에 대한 비판과 야유가 시의 어법으로 그려져 있다.

첫째 수에서는 그런 현상들을 비유를 통해서 부각시킨다. 양파껍질을 벗길 때 그 매운맛으로 눈물을 쏙 빼게 하듯이, 티브이[언론]의 역할이 그러하지 못함을 개탄한다. 잠자는 뉴스가 시적 화자의 눈꺼풀에 아무 자극을 주지 않는 티브이뉴스는 이미 언론이 아니다. 양파껍질 벗기기가 있다. 뭔가 중핵이 있을 것 같아 벗겨보지만 결국 알맹이가 없는 것처럼, 근래 다수의 언론이 그런 형국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수에서는 검언유착으로 드러난 검찰 권력의 민낯이다. 검찰의 긴 칼은 국민이 부여했건만, 그 칼은 밖으로는 예리하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무딘 칼이다. 내 편을 베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무소불위 권력에 민주적 통제를 가하려는 개혁 세력에게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이,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듯이 휘둘러대고 있음을 야유한다.

셋째 수에서는 언론의 비뚤어진 행태를 고발한다. 오죽하면 기자를 부르는 별칭이 이렇게 조롱 투일까? 요즈음 기자를 바라보는 시중의 평가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기자들이 발로 뛰어 팩트를 찾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흘려준 정보를 받아쓰기하는 자들로 전락했다. 권력의 횡포를 감시해야 할 기자들의 사명을 망각한 지 오래다. 그래서 기자를 기자라 부르지 않고, 기레기[기자+쓰레기]라거나, 기더기[기자+구더기]라거나, 사주와 재벌과 검찰의 애완견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태다.

매우 첨예한 세태를 정형시의 틀에 담아낼지라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정형시인 시조의 운율을 빌려 현실을 풍자한다. 모처럼 자연 서정에서 벗어나 가장 첨예한 현실 문제를 소재로 담아낸 연시조가 빛을 발하는 듯하다. 불의한 세력에게 저항해야 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책무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다면 벽을 향해 욕이라도 해주라던 김대중 대통령의 고언이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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