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구름이었으면
나도 구름이었으면
  • 전주일보
  • 승인 2021.06.2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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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수필가
백금종/수필가

요즈음 나는 내 주변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보며 인생의 함의를 생각하고, 유장히 흐르는 강물도 그의 안식처가 어디쯤인가를 가늠해 보곤 한다. 바람에 떨어져 구르는 낙엽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잎새에 맺힌 이슬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려 애쓴다. 그리고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의 행로에서도 그 의미를 찾곤 한다.

그러한 이유는 나이가 쌓이면서 무디어지고 메말라가는 내 심신 어디쯤 어린 시절의 새싹같이 풋풋한 호기심과 감성이 자리하고 있다가 고개를 불쑥 내밀기 때문이다. 또 나도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새삼 자주 생각하는 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자연현상 중에서도 늘 신비롭고 하염없이 빠져드는 것은 구름이다. 아마도 쉼 없이 변화하는 데에 마음이 끌려서 일 것이다. 가을 맑은 날 푸른 하늘 높이 떠 있는 새털구름은 척박한 마음 밭에 포근한 안정을 준다. 여름날 뇌성벽력을 동반한 비구름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하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런가 하면 겨울날 먹구름이 칼바람을 앞세워 산등성이를 넘어오면 세월을 훑고 지나간 혹독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구름이 내 마음속에 깊게 똬리를 틀게 된 것은 또 다른 사연이 있어서다.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서해 낙조를 감상하러 월명암을 찾았을 때였다. 어둠발과 함께 해가 서쪽 바다에 내려서자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붉은 해가 사위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주위는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온통 적자색(赤紫色)이었다. 수평선이 불꽃을 토해내듯 끓어올랐다. 서쪽 하늘에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뭉게구름, 넘어간 해가 내 뿜는 붉은 빛이 수면에서 굴절하여 구름에 현란한 색으로 투영되었다.

구름은 마치 붉은 물감을 머금은 아이스크림인 듯 보송보송해지는가 하면, 진분홍 비단인 듯 고았다. 때로는 붉은 진주를 머금고 승천하는 백룡이 되었다가 백색 무희가 꽃 안개 그윽한 산정에서 진양조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형상이었다. 낙조와 바람이 빚어내는 신비한 구름의 모습에 무디고 메마른 감성을 지닌 사내들 입에서도 탄성이 터졌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구름처럼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과 시간의 조화에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갖가지 형상이 보는 동안이라도 머물러 주기를 바랬지만, 그건 우리의 소망이었을 뿐, 어둠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내 삶에서 보람차고 즐거웠던 시절이 삽시간에 흘러가고 어느새 늙바탕에 이르러 이제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듯 서편 하늘을 장엄하게 장식했던 순간은 짧은 감동만 남기고 어둠 속에 묻혀 사라졌다.

구름은 형체가 있는 듯 없는 허상이다. 눈으로는 보이지만, 그건 실체가 아니다. 손으로 쥘 수 없고 잡히지 않는 것, 그것이 구름이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으나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만 나의 삶이 저 구름을 닮지 않았는지?

멀리 와버린 지금 뒤를 돌아보니 서산대사의 해탈시라고도 부르는 한시가 떠오른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한 조각의 뜬구름 같다고. 그래, 구름같이 흘러가는 인생, 욕심을 부릴 일도 아니고 아등바등 다툴 일도 아니다.

잎들이 진초록 물감을 마구 쏟아내는 초여름 석양의 오후다. 창문 저편으로 확 트인 파란 하늘이 보인다. 태양 빛을 머금은 구름이 갖가지 형상을 이루며 무심히 흘러간다. 아무 저항도 머뭇거림도 없다.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서로 경쟁하며 흐르는 듯하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지 않는다. 언제나 어울려 형체를 이루며 함께 가는 동행은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 아닐까?

바람이 불면 그 모습은 순간순간 변화하면서 결코 그의 본성을 잃지 않은 의연함도 나에게 필요하다. 어제의 구름이 오늘의 구름과 같지 않듯 항상 새롭게 변화하는 태도도 이 시대의 필수 항목이다.

나도 모든 욕심 버리고 가벼운 몸짓으로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그래서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활력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작은 내 안에서 갖가지 사슬에 묶여 사는 요즘의 내가 꿈꾸는.

저 자유. 저 여유. 구름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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