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내 삶의 급소를 찌른 기록이다!”
“시는 내 삶의 급소를 찌른 기록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05.0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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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내 삶의 급소를 찌른 기록이다!”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한낮

대웅전 앞뜰에서 삼백년을 살아온 나무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한다

까치 한마리가 날아들어

어디를 건드린 듯

하기야 급소가 없다면

벗어나야 할 삶도 없겠지

 

-김광규(1941~ 서울)보리수가 갑자기전문

 

나의 급소는 어디[무엇]일까, 누가[무엇이] 나의 급소를 건드릴까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에 시동을 건 것은 물론 이 시의 맥락에서 비롯하였다.

시의 진술 맥락을 따라가 본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한낮이다. → ㉡[대웅전 앞뜰]삼백년을 산 보리수나무 →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다 → ㉣[보리수나무가]움찔한다 → ㉤[아마도 까치가 보리수나무 급소를 건드린 모양이다] → ㉥[살아 있는 것치고]급소가 없다면 벗어날 삶도 없다.” 여기에서 실은 을 시의 진술과 달리 인과관계의 순서에 맞췄다. 소통의 편리를 위해 그렇게 재배치해 봤다.

시에서는 도치법이나 생략법을 구사해서 독자들의 안이한 독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인과관계의 평탄함에 충격을 주어, 사유를 긴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모를 바 아니다. 삼백 년이나 산 보리수나무가 하필이면 대웅전뜰 앞에 서 있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그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어찌 나무 한 그루에 그치겠는가? 사람 역시 서 있는 위치-자리에 따라서 사람값에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서 있는 자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물이 무엇이 있을까, 아니 누구는 흙수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고, 누구는 금수저로 태어나기 싫어도 태어났을까? 그러고 보면 서 있는 자리야말로 우연의 소산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운명이네, 하늘의 뜻이네, 혹은 삼대에 걸쳐 인정을 쌓은 덕이네, 모두 뜬구름 잡는 격일 뿐이다.

그나저나 실은 이 대웅전 앞뜰의 보리수나무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를 떠올렸다. 『禪의 황금시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터다. 워낙 독서 재미를 누렸던지, 대답이 곤궁할 때마다 이 뜰 앞의 잣나무가 떠오르곤 한다. 아마도 이 시의 시적 자아도 속으로는 나처럼 뜰 앞의 잣나무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시를 읽다보면 즐거운 의심이 때로는 우둔한 답변보다 훨씬 나은 경우가 많다.

조주화상에게 한 행자가 물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니라[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 庭前柏樹子] 수행승의 물음에 조주선사께서 시시콜콜 대답하려면 그랬을 것이다. 앞에는 석가모니께서 계시고, 뒤에는 미륵보살께서 나투실 것이며……, 끝도 없이 변설을 낳다 보면 결국은 석가도, 미륵도 없고 달마대사만 남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말로써 말을 이해하려 말고 그냥 뜰 앞의 잣나무’[달마대사]만을 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다음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말은 일을 펼칠 수 없고, 말하는 것으로는 기틀에 투합하지 못하며, 말을 이어받는 자는 참뜻을 잃[죽이]게 되고, 글귀에 머물러 있으면 스스로 미혹할 뿐이다.[言無展事 語不投機 承言者喪 滯句者迷]그러니 이런 말, 저런 말로 진실을 넘보지 말고 말없이 수행정진[無門關 修行]하는 길만이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뜰 앞의 잣나무라는 엉뚱한 듯이 보이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웅전 앞의 보리수나무도 잣나무와 다를 바 없다. 삼백 년이 아니라 삼천세계를 다 살아보아도 삼라만상은 저마다 연기-연관되어 있을 뿐이지, 외따로 떨어져 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저마다 지닌 삶의 핵심[급소]은 가지고 있을 터, 그 급소를 찾아 제대로 수행의 정점에 이를 때, 연기의 삶은 결실을 맺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한다느꼈을 터이다.

그러니까, 보리수가 움찔한 것이 아니라, 실은 이를 연기적 관점으로 바라본[해석한] 시적 화자의 혜안이 놀랍게도 조주선사의 그것과 매우 닮은 것으로 보여, 나 역시 움찔하였던 것이다. 이런 반응 역시 나의 급소를 찌른 것이니, 그 이유는 이렇다.

연기적 상관성은 꼭 무슨 조건이나 자극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인가. 일상의 삶을 어떻든 보다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의 힘, 탐구심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뿐이다. 이를 거창하게 성장하는 삶이라 명명하고 싶지만, 반드시 성장하지 않아도 꼭 주어진 오늘이 꼭 그만큼 사라지는 일상임을 실감하면서 드는 생각인 것이다.

이때 삼백년 보리수나무를 움찔하게 한 것이 까치였다면, 내 삶의 급소를 움찔하게 찌른 까치는 무엇이냐, 그게 남는다. 그것 역시 자문자답이되 우문현답을 기대하며 감히 가 바로 까치임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는 내 삶의 급소를 찔러 느슨해진 삶을 움찔’, 급소에서 벗어나게 한 기록이다,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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