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에 돋아난 생명의 환희
말뚝에 돋아난 생명의 환희
  • 전주일보
  • 승인 2021.04.2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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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혁신도시 근교에는 묵정밭이 있다. 본래 이 밭은 아카시아밭이었다. 밭 주인이 개간하여 주말농장으로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 밭이 아카시아밭일 때는 밭 주인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그도 그런 것이 무섭게 뻗어오는 아카시아 뿌리에 진절머리가 났고 무성하게 하늘로 치솟는 가지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기세에 눌러 다른 풀들은 자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면, 인근 주민들에게는 커다란 힐링을 안겨주었다. 신록이 우거지고 뻐꾸기가 울어 댈 때면 늦부지런을 떤 아카시아는 줄줄이 등불처럼 매달린 아름다운 꽃을 무수히 피워냈다. 탐스럽게 핀 하양 꽃에 매료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 향기는 바람 속에 날려 뭇 생명체를 유혹했다. 꿀 사냥에 나선 크고 작은 벌들이 윙윙거리고 새들이 모여 저마다 목청을 뽐내 노래했다. 그 소리를 듣는 인간들은 자연의 아름다운 화음에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때 묻지 않은 자연 친화적인 정원이 바로 그곳이었다.

현장에 가보니 개간했다고는 하나 텃밭의 모습은 어수선하다. 정리가 다 되지 않아 마치 누더기처럼 너절하고 과연 주말농장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를 정도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땅을 파 엎고 씨앗을 묻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겨우 말뚝을 박고 줄을 쳐서 자기의 영역표시를 해둔 정도다.

크기도 제멋대로이고 높낮이도 달라 마치 옛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화전을 방불케 했다. 아니 남해나 청산도의 다랑논 같다고나 할까? 어릴 적 꼬마 친구들과 땅따먹기 놀이하던 땅 같기도 하다.

묵정밭을 둘러보다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곳에는 영역표시로 말뚝을 박아 놓았는데 그 말뚝에 잎이 나와 가지를 만들 채비를 하고 있다. 그것도 한두 잎이 아니고 말뚝 전체에 골고루 나 있지 않은가? 촘촘히 훑어보니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새 움을 틔우는 즈음에 나뭇가지를 톱으로 싹둑 잘라서 망치로 때려 박아 놓았으니……. 굵기는 거의 아기 팔뚝만 하고 길이는 1.5m쯤 되어 보인다. 황무지와 다름없는 척박한 땅에 망치로 때려 박은 나무토막이 생명을 이어서 윤기 있고 순하디순한 잎새를 돋워 낸 위력에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나무토막의 생명력을 보아라! 뿌리도 잔가지도 다 잘려 나간 몸으로 파란 잎새를 틔우며 삶의 꿈을 버리지 않은 결연한 의지에 절로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어디에 생명의 힘을 갈무리하고 있다가 소리 없는 연녹색 웃음을 마구 뿌려대고 있는지?

주인은 단지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이 말뚝을 사용했으리라. 밭을 잘 경작해서 채소도 거두고 주말농장에서 답답한 코로나를 잊고 삶의 보람을 느끼려 했을 것이다. 그저 나뭇가지 말뚝은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기대한 외에 다른 기대가 있었을 리가 없다. 잘라낸 나뭇가지의 생명을 걱정하거나 벋어나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 자신도 이 말뚝처럼 척박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때가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꿈을 찾아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저 하얀 벌판 위에 푸른 깃발을 세우리라이를 지긋하게 물었다. 피붙이는 말할 것 없고 말 붙이기조차 쉬운 이 하나 없는, 낯설고 물 서른 객지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동강 잘린 말뚝같이 적나라한 몸으로 황무지 같은 서울 바닥에서 몸부림쳤으나, 행운은 나를 비켜 갔다. 숯덩이같이 타버린 사연을 가슴에 새긴 채 한 마리의 철새처럼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 말뚝처럼 스스로 딛고 일어나 꽃피우려는 저력이 부족했지 싶다.

<수용소군도>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의 소설가 솔제니친이 땔감용 느릅나무 장작을 톱으로 켜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토막에 파르스름한 싹이 돋아나고 있어서다. 단두대에서 스러져간 이들이 생각난 그는 올려놓았던 그 느릅나무에 그만 톱질을 중지했다.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나무토막을 자를 수가 없었다는 그의 수필에 나온 내용이다.

말뚝을 뽑아 물기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 말뚝의 얼굴에는 늦봄의 햇살이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삶의 새 보금자리를 얻었으니 언제쯤 뿌리도 내리고 두 팔을 하늘로 뻗어 낼 수 있을까.

그 생명이 굳건히 일어서서 한 그루 나무로 환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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