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부유한 불화보다 가난한 평화를…”
“사랑, 부유한 불화보다 가난한 평화를…”
  • 전주일보
  • 승인 2021.04.19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좋은 시, 좋은 삶

 

“사랑, 부유한 불화보다 가난한 평화를…”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김영승(1959~ 인천)반성 100전문

 

글을 읽으며 콧등이 시큰한 경험은 유쾌한 일이다. 급기야 그 단계를 지나 눈물이라도 핑~ 도는 경지에 이른다면 보통일이 아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거나, 집에서 다큐프로그램을 보며 이런 일이 이따금 있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아닌 척 눈물을 씻어내고 나면 그뿐이다. 더구나 산문이나 소설이 아니라, 시를 읽으며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도는 일은 내겐 가끔 있는 일이다. 한사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런 나를 나도 말릴 수가 없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뿐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측간 벽면에 붙은 경고문을 생각할 때마다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의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럴 일도 아니다. 노안이 되면서 책을 오래 읽거나 TV를 시청하다보면 이따금 눈이 뻑뻑한 느낌을 받는다. 이럴 때마다 인공눈물이라며 세정제를 투입해 뻑뻑한 눈동자의 촉감을 달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다가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돌고나면 마치 인공눈물-세정제를 넣은 때처럼 눈이 한결 편안해지고 시야가 새롭게 열리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 그럴 때 이제는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마냥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둔다. 하긴 이런 글은 혼자서 다락책방에서 읽는 것이니 누구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세정제 대신 눈물 흘릴 읽을거리나 많았으면 좋겠다.

이 시도 그랬다. 이 시를 읽고 나자, ‘어라?’ 예의 세정제가 내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시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더 정독할 때까지 그랬다. 그런 뒤 이 시를 좀 더 자세히 따져봐야겠다고, 작심하고 나자 세정제[눈물] 나는 일이 그쳤다.

이 작품에 담긴 무엇이 나의 눈시울을 적셨을까? 곰곰 생각해 봤다. 가난 때문일까, 아님 힘겨운 노동 때문일까, 더구나 소녀노동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각박한 삶의 고단함 때문일까? 하긴 이 모든 요소들이 필자에게 감동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 한두 요소만이 아니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언어, 언어와 언어 사이에 교류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 인물들이 그려내는 작업 모습,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등 모든 요소들이 참여하고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언표하지 않은 감정선感情線이 독자인 나의 누선淚腺을 자극하였음에 틀림없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선 성급하지만 사랑-가족애라 진단한다. 이 작품은 가족의 사랑이라는 언어그림을 그리기 위해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을 덧칠한 셈이다. 그리하여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달은 사라지고 따뜻한 가족애가 겨울철 연탄불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족사랑 온도에 감전된 독자치고 누가 누선을 자극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난도 뜨거운 연탄불-가족사랑 앞에서는 그리 남루하지 않다. 겨울노동의 고단함도 연탄불-가족사랑 앞에서는 그리 손 시리지 않다. 그래서 사랑의 근원이자 시발점은 아무래도 가정-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낳게 한다

무엇보다도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 이 한 마디에는 소위 철든 어른에게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순수한 소녀[티 벗지 못한] 딸들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천금의 위안이요, 만금의 보람이요, 억만금의 용기에 값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아빠, 힘들지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딸들이 있잖아요? 이까짓 백장의 연탄, 우리가 나서면 금방 나를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라는 구차한 위로의 말을 단 한 마디 에 담아낼 수 있는 소녀들을 누가 가난한 집 철부지 소녀라고 하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위로의 마음 이전에, 아빠가 어린 딸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할까봐, 아빠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주느라 금방이겠다하고는 꼬리말로 를 붙인 것이다

또 이전에는 백장은 아무것도 아닌 더 많은 연탄을 날랐던 적도 있음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아빠와 함께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어린 딸들의 마음이 함축되어 있지 않겠는가? 누구는 어린 것들이 철도 일찍 들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어찌 사려 깊음이나 철듦만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저 혼자서 고생하시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지극한 사랑[마음]이 아니고서는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가정보감家庭寶鑑-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부유한 불화보다 가난한 평화를 바라는 이유를 바로 이 소녀-딸들은 실천으로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땅의 모든 가정-가족은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할 수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