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삼킨 아기는 까르르 웃고
봄을 삼킨 아기는 까르르 웃고
  • 전주일보
  • 승인 2021.04.1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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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 /수필가
김고운 / 수필가

일요일 이른 오후, 출근 전 자투리 시간이 아까워 카메라를 메고 삼천변 벚꽃길을 찾아갔다. 비가 그치고 한껏 생기가 넘치는 벚꽃이 눈부신 길에 여기저기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코로나가 없었더라면 휴일 오후에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시민이 나왔을 터이다. 요쿠르트나 음료, 커피, 간식을 파는 작은 행상들도 반짝 경기를 즐거워할 기회인데 벚꽃잎만 간간이 바람에 날릴 뿐 예년에 보던 그들도 시민도 없다.

모든 것이 달라진 코로나 시대의 아픈 현장이다. 그래도 벚꽃 길에 들어서서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걸었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를 어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것인가? 은은한 꽃향기와 벌들, 간혹 작은 나비도 눈에 띄었다.

호르르 떨어지는 꽃잎이 간혹 얼굴을 스치며 날리는 길엔 봄볕과 벚꽃, 화향(花香)이 아늑한 사랑의 앙상블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저절로 평화와 사랑이 솟아 넘치는 꽃길, 그런 정경을 보겠다고 자전거를 타고 간 보람은 넉넉했다.

카메라를 들어 꽃길과 바람에 하늘거리는 꽃가지를 담고 두리번거리다가 길섶 풀 속에 작은 바이올렛 꽃이 눈에 띄었다. 제비꽃 한 포기가 가벼운 바람에 고개를 까닥이고 있다

아득히 먼 내 어릴 적에 처음 흰 제비꽃을 밭 가에서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게 뭐야?” “제비꽃이란다.” “에이 이게 무슨 제비, 땅바닥에 붙어있는 게 제비면 나는 독수리다.” “하하, 그래 너 독수리다.” 어머니는 뭐든 물어보면 척척 대답해주던 내 궁금증 사전이었고 나는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궁금한 건 다 물었다.

오랜 기억을 소환한 제비꽃이 반가워 화각을 돌려가며 촬영하고 있는데, 젊은 여인이 유모차를 세우며 그게 제비꽃 아니예요?”하고 묻는다. “예 맞습니다.” 여인은 꽃이 너무 예뻐요.”라며 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나는 촬영을 마친 참이라 일어서서 막 가려는데 유모차 안에 얼굴이 동그랗고 토실토실한 젖먹이 아기가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크고 웃는 얼굴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한 번 얼러줄 생각으로 눈을 맞추려 가까이 다가서는데 아기 손바로에 벚꽃잎이 날려 떨어졌다. 그때 아기가 그 꽃잎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집더니 곧장 입으로 넣었다. 꽃잎을 입에 넣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꽃잎은 아기 혀에 붙어있다. 아기는 혀에 꽃잎을 붙인 채 까르르 웃는다.

아기가 처음 만난 봄, 벚꽃잎을 덜컥 입에 넣고 천진스럽게 웃는 아기. 그 얼굴에서 무엇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평화가 퍼져 나와 온 세상의 아픔과 고뇌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원죄 없이 순수한 사랑과 평화의 본디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백지보다 더 하얗고 맑은 순수함, 어떤 더러움도 닿지 않은 아기의 얼굴에 봄 한 자락이 날아와 어우러지는 광경은 내 짧은 글로 적을 수 없는 커다란 충격처럼 다가왔다. 오랜 세월 잊었던,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경외감 같은 무엇이 솟아 올라왔다.

홍진(紅塵)에 찌든 내 마음이 그 천진하고 맑은 것을 보며 크게 부끄러움을 느낀 그런 참회(懺悔)의 마음이었을 듯하다전류가 내 몸을 관통하듯 큰 감동이 지나갔다. 아기는 처음 겪는 봄을 한 장 꽃잎에 담아 통째로 제 몸에 받아들였다.

봄은 그렇게 아기 입속으로 사라졌다. 꽃잎 한 장이 떨어져 봄이 사위어 간다던 두보(杜甫)의 시심(詩心)이 아기의 천진한 웃음을 타고 오늘의 봄으로 환생하는 순간이다. 그 시심조차 아기의 맑은 웃음과는 견줄 수 없을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이 봄을 통째로 삼킨 아기는 꽃잎이 호르르 날려 떨어지는 광경에 유모차를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손뼉을 치며 연신 즐거워 신바람이 났다. 아기 엄마는 제비꽃을 보다가 일어서서 좋아하는 아기를 보며 뭐가 그렇게 좋아? 데리고 나오길 잘했네라며 내게 눈인사를 보내고 유모차를 밀어 그 자리를 떠났다. 벚꽃잎 한 장을 아기가 먹은 걸 말해줄까 하다가 독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싶어 말하지 않았다.

‘  아이야, 그건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란다.’

삶의 끝자락에야 조금씩 철이 들어 귀한 것을 알아보고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도 얻었다. 남은 시간이 노루 꼬리만큼인 지금, 아기의 티 없는 웃음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닌, 자연이 삶의 끝자락을 딛고 가는 내게 주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조바심하지 말고 아름답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다 떠나라는 의미였지 싶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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