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힌 등불”
“시,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힌 등불”
  • 전주일보
  • 승인 2021.03.2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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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힌 등불

무더운 여름날

어쩌다 미풍이 얼굴을 스치거나,

외할머니 부채손길이 이르면

나는 그만 평상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어득히 먼 은하를 향해

길게 다리를 뻗곤 했다

 

외할머니 무릎베개가 허락한

밤하늘 별자리의 노래를

또박또박 받아쓰곤 했다

 

별똥별이 내 노래를 오답처리 할지라도

외할머니 부채손길이 쓰다듬어 주실 때마다

나는 그만, 빙그레 만점 여름을 나곤 했다.

 

-정정애(1940~ 전북 전주)외할머니전문

        

시는 정서의 산물이라는 정의는 오래된 정설이다. 그렇다면 정서란 무엇일까? 정서를 어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정의하기는 쉽다. 정서情緖감정의 실마리라고 한 것은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 해놓은 듯하고, 심리학에서 보는 정서란 본능을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일시적인 심적 현상으로 기쁨, 노염, 사랑, 걱정, 공포, 시기, 후회 따위를 이른다고 정의한다. 이 모두 한글학회 지음우리말큰사전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정의만으로 시를 정서의 산물이라고 할 때의 정서를 실감 있게 이해하기에는 미진한 듯하다. 이를 좀 더 시문학적 입장이나 정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예술적 관점에서 정서의 의미를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다음 몇 가지를 전제할 때 가능할 것이다.

우선 정서는 이성理性과 대립된 관점에서 볼 때 명확해 질 수 있다. 이성은 사유의 결과이지만, 정서는 감성에서 비롯한다. 흔히 이성은 머리에서 나오고, 감성은 가슴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 말은 사실 이성이나 감성이나 두뇌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부정확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머리=이성 : 가슴=감성]을 믿고 싶은 것일까? 이것은 이성은 사물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라면, 정서는 인간의 몸이 감각하는 느낌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전달되는 감각이 감성을 일으키고, 이 감성이 각자의 개별적 체험과 결부되어 일정한 실마리를 갖는 느낌을 우리는 흔히 정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 창작은 개별 예술가들이 체험한 감정의 실마리즉 정서의 반응인 셈이다. 그 반응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다른 정서를 다시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이 바로 예술 창작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개념을 사유하는 이성적 결과는 누구나 동일할 수 있지만, 감각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감성의 실마리[정서]는 사람마다 같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예술가의 개성과 예술품의 창의성이 드러나게 된다.

외할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외할머니에 대한 정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필자 경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할머니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결핍은 일종의 성장 통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시인처럼, 당신 자신이 손주들의 할머니가 되었을 연치에 이르러서도 외할머니를 정서의 맥락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면서, 그리움의 정서를 매우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서의 맥락을 따라가면서 주목에 값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성적으로 획득한 것은 한번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구구셈을, 가감승제를, 도량형기의 단위를, 교통규칙을, 예의범절을 되풀이해서 외우고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서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온몸이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큰 느낌도 그것은 곧 휘발되고 만다. 그래서 그리움이나 외로움, 사랑이나 미움, 기쁨이나 슬픔등 정서적 체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회피하고 싶은 정서마저도 사람됨의 길에서는 진정 피할 수 없어 비가悲歌를 부르는 게 인간이다. 하물며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부채손길을 그리워하는 정서, 그리운 것을 그리워할 줄 아는 삶이야말로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임이 분명하다.

둘째는 잘 사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잘 살고 싶은 길에 걸림돌이 있다고 불평한다. 물질적 궁핍, 인간관계의 버석거림, 사회적 성취결과의 불만 등으로 괴로워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늙음이다. 그러나 이 무참한 시간의 횡포도 가볍게 물리치는 길을 이 작품은 제시하고 있다. “외할머니 무릎베개가 허락한/ 밤하늘 별자리 노래를/ 또박또박 받아쓰면서 스스로 잘 사는 길을 열어간다. 이런 시적 자아에겐 세월의 횡포도 무력할 뿐이다.

셋째는 오래 사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인간이 끝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을 지닐 때 오래 살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쉬지 않고 내 인생을 노래하는 길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별똥별이 내 노래를 오답처리해도/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나는 그만, 빙그레 만점 여름을을 나면 그만이다. 별똥별은 하늘을 가로질러 제 몫을 다한다. 언젠가 시적화자의 일생도 별똥별의 길을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빙그레 만점 여름을 날 수 있는 삶, 이보다 더 사람답게, 오래, 잘 사는 길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시는 그런 길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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