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바람에 실려 온 봄
남쪽 바람에 실려 온 봄
  • 전주일보
  • 승인 2021.03.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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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숙/수필가
김 영 숙/수필가

봄의 발걸음이 분주하더니 3월 초순인데 벌써 꽃소식이 풍성하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자연이 경이롭다. 봄은 추위와 삭풍을 고비마다 잘 버텨낸 인고(忍苦)의 절정이 꽃으로 다가서는 계절이다. 그래서 봄은 희망을 노래하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기쁨이 충만한 때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감성에 끌려 나도 들판 방석에 앉아 쑥을 뜯는다. 칼을 대면 세상의 온기를 얻고 쑥 내민 새순이 아무런 저항 없이 온몸을 다 내주고 그 진한 향기는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정화한다. 이들은 멀리 남쪽에서부터 부산하게 달려온 봄의 전령사가 분명하다. 들에 나와 보니 어느새 봄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파릇파릇한 쑥은 손가락만큼 자랐고 겨우내 혹한을 견뎌낸 냉이는 벌써 꽃대를 올려 하얀 꽃을 피웠다. 개천 가장자리에 돌미나리도 꽤 파릇파릇하다.

저만치 밭에서는 밭고랑 타는 노부부의 모습이 액자 속 풍경처럼 정겹다. 한동안 가물어 농업용수 확보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며칠 사이 단비가 내리더니 급기야 오늘 새벽에는 시원하게 소나기까지 쏟아져서 들녘은 만족했다는 듯 포만감에 빠져 있다. 농부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덕분에 들녘에는 오랜만에 사람이 넘쳐나지만, 밭을 갈고 고랑을 타며 고추 모종 심을 준비하는 분주한 풍경 속 주인공은 언제부턴가 어르신들이다. 노령화한 농촌 어디서나 흔한 광경이다. 햇살을 등에 업고 쑥만 캐기가 영 죄송스러워서 잠시 비닐 씌우는 일을 거들어 드렸다. 그래봤자 고작 두렁을 돋워 놓고 비닐을 씌우는 작업 중에서 비닐을 잡아드리는 일이다. 그 또한 처음 해보는 일이라 그런지 수월하지는 않았다. 어르신이야 수년을 함께 맞춰온 호흡이니, 눈감고도 척척 맞는 찰떡궁합이다. 한쪽 고랑 끝에서 비닐을 잡고 살살 돌려가며 맞은편 고랑 끝으로 밀고 가는 작업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배워서 몇 고랑 치는 데 일조했다. 많은 농사야 기계가 하는 세상이지만 소일거리로 식구들 먹을 만큼 짓는 농사이다 보니 일손만 분주하다. 두 분이 운동 삼아 하시는 거라지만 농사일이 노동이지 어찌 운동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라도 더 키우고 더 거둬서 자식들한테 보내는 재미가 당신들 힘든 일보다 더 좋다고 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이 봄꽃처럼 화사하다.

김나영 시인의 시 택배로 온 봄에서는 제주 고사리를 택배로 받고 내 그리움을 풀어헤치고 아부오름과 다랑쉬오름과 한라산 자락과 제주 앞바다가 붐붐붐 서울 창공을 날아 우리 집 거실로 통째로 건너오는 게 아니겠어요라고 했다. 시에서 고사리는 그냥 나물이 아니라 제주의 봄이었는데 어르신의 자녀들은 부모님이 이렇듯 애써서 지은 먹거리를 택배로 보내면 어떤 마음으로 받을까? 힘든데 뭐 하러 농사 짓냐고,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프면 병원비가 더 든다며 타박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식이야 부모님이 편히 사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뱉는 말이라지만, 이렇게라도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니 건강하신 것이라며 덕분에 고향의 맛을 보는 것이라며 이왕이면 시인처럼 좋은 마음으로 받았으면 좋겠다는 오지랖을 앞세워 본다.

나물도 조급하게 뜯으면 재미가 없다. 이렇듯 주위 풍경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참견도 하며 뜯어야 제 맛이다. 꽃나무마다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하기도 하고 성질 급한 꽃은 활짝 피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으뜸은 봄까치꽃이 아닐까 싶다. 한겨울에도 양지에서 꽃을 피우더니 밭을 온통 보라색으로 색칠할 기세로 의기양양하게 손톱만 한 꽃으로 그들의 영역을 넓힌다. 이렇듯 생동하는 들에서 쑥이며 냉이며 불미나리까지 챙기니 나 또한 빗물 먹은 대지처럼 포만감에 넉넉해진다. 마음은 한 뼘의 땅, 한 줌의 햇살이 다 내 정원인 양 넉넉하다. 오늘 저녁은 남녘에서 보내온 봄이 키워 준 봄나물을 맛있게 데치고 무쳐서 고마운 자연의 밥상을 한 상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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