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진인眞人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
“꿈, 진인眞人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
  • 전주일보
  • 승인 2021.03.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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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인眞人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

밝고 어두운 세상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드러나는 또 하나의 나;

넓어서 작아진

지상의 한 점

빛의 성을 쌓고

어둠으로 문을 단 성문 앞에서

나를 여닫을 날을 셈한다

큰 소망을

작은 운명으로 풀어보자 하니

길다던 한평생

구겨진 옷 다리느라

세월만 짧아지는가,

날을 세운 하루하루가

작은 이름도 없지만, 마지막

내 꿈을 짊어진

시로 남고 싶다

박성규(1948~ 전북 임실)꿈 앞에서전문

우리는 아주 쉽게 꿈[理想]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발설하는 꿈의 실체를 듣고 나면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실에서 결핍된 것을 채우고 이루는 것을 꿈이라고 포장하거나 착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월급 많고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 좋은 집을 갖는 것, 이상적인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등을 꿈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심지어 의사나 판검사가 되는 것, 대통령이나 재벌이 되는 것, 유명 연예인이나 돈 많이 버는 스포츠 스타가 되는 것을 꿈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물론 이런 지향성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가 꿈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언급한 목표들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은 될 수 있으나, 그 자체가 꿈이 될 수는 없다. 다음 몇 가지 사례만 봐도 왜 이런 수단들이 꿈이 될 수 없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영국의 해럴드 십먼은 가정의로 지내는 동안 약250명의 환자를 살해한 것으로 영국 법원은 밝혔다.(2005.1.27) 여기에 비하면 의사면허취소법을 관철시키면 코로나19 백신접종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협박한 우리나라 의사협회장의 선언은 섬뜩한 애교(?)로 보아야 할까.

킬링필드를 자행하여 국민의 4분의1을 살해한 캄보디아 폴 포트,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히틀러, 동족 80만 명을 온갖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한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 국민의 군대로 하여금 국민을 살해하고도 단 한 마디도 뉘우치지 않는 전두환, 이들은 인류의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드리운 한 나라의 최고통수권자[대통령]들이었다.

유전무죄-무전유죄를 세상의 상식이 되게 하고도 누구 하나 반성하지 않는 우리나라 판검사들, 결혼의 조건이 사랑이 아니라 물물교환의 성격으로 변질된 결혼 풍토 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그러니 무엇이 되겠다는 것은 꿈이 될 수 없다. 그 앞에 어떤이 빠졌기 때문이다. ‘무엇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진정 꿈의 실체다. 사람이 먼저 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이상일 수 없다. ‘有眞人而後有眞知(유진인이후유진지莊子)라고 했다. “참된 사람이 있고난 다음에야 참된 지식이 있다.” 사람다운 사람이 먼저 되지 않고서는 어떤 이상도 펼칠 수 없는 노릇이다. 앞에서 예를 든 자들의 행적이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이 시꿈 앞에서는 사람의 길을 노래한다. 시적화자는 사람이 되는 길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이르겠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연 구별 없이 내용에서 4연의 단계를 거쳐 그런 꿈을 펼쳐낸다.

1~3[1]에서는 자아를 발견한다. 삶은 명암의 세계다.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 평화와 전쟁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이분법적 사유로 삶을 내몰다가는 나를 잃기 마련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자아는 아연,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이후에 이어지는 2연과 3연은 시적화자가 발견한 자아의 모습이다. [;] 부호가 그것을 보여준다.

4~8[2]에서 시적자아는 광막한 천하의 유일한 단독자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 왔음을 고백한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지만, ‘빛의 존재가 되려 했다. 그냥 어둠에 묻혀버릴 됨됨이가 아니라, ‘어둠의 성문을 열려는 시도조차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런 날들이 유한한 것임을 자각한 것 또한 이 세계의 단독자로서의 분명한 자각이다.

9~13[3]에서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꿈이 아무리 크다 한들, 엇갈린 삶의 구차함을 떨쳐버리려 한들, 그것은 결국 유한한 여생만 축내는 행위다. 지나온 삶의 족적을 추적하여 바로잡기[구겨진 옷 다리기]에 우리 인생에 허용된 세월은 짧기만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시적자아의 세계가 바로 14~17[4]이다. 시적화자는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내 꿈을 짊어진/ 시로 남고 싶다고 했다. 무엇하는 사람이 꿈이 아니라, 바로 시를 꿈꾸는, 어떠한 사람으로 남겠다는 것이다. 먼저 진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자기 앞에 구축된 허구적 앎의 체계를 허물어 구체적인 삶으로 변용시키는 자다. 그래서 시로 남겠다는 것은 곧 시적인 삶을 통해서 진인으로서 여생을 불사르겠다는 자기선언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드러난 또 하나의 나는 어설픈 사람[詩人]되기가 아니라, 참사람[眞人]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이다. 이 꿈이 기승전-의 구도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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