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삶을 견딘 인생의 스승”
“세월, 삶을 견딘 인생의 스승”
  • 전주일보
  • 승인 2021.03.0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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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삶을 견딘 인생의 스승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1933~전북 군산)전문

이라는 제목의 시를 생각하면 푸쉬킨(1799~1837. 러시아)의 동명의 시가 떠오른 곤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원시에는 제목이 없이 작품 번호만 붙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의 첫 행을 제목으로 삼으며, 그냥 줄여서 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번역이 얼마나 러시아어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시의 맥락만은 짚어볼 수 있게 친근한 시다. 또한 이 시가 우리네 정서와 잘 맞아서 까까머리 학창시절부터 줄곧 외워오던 시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고은의을 만났다. 푸쉬킨이 시를 풀어내는 정서와 고은의 시가 삶을 대하는 맥락이 매우 닮아 있어 묘한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푸쉬킨의 은 세 개의 내용 단락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삶[생활]이 그대[독자]를 속일지라도 성내거나 슬퍼하지 말라. 둘째 [성냄과 슬픔을]참고 견디면 즐거운[기쁜] 날은 오고야 만다. 셋째 현재[살아있음]은 우울하지만 결국 지나가는 것이고, 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된다는 맥락이다. 삶은 언제나 속고 속이며 슬픈 것이지만, 희망을 갖고 참고 견디며 사노라면, 그리움처럼 미래가 다가온다.

고은의 도 푸쉬킨의 시와 서정 맥락을 같이 한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가난할지라도] 떨어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아는 것이 없더라도[어둠에 헤맬지라도] 썰물 때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을 가지고[소유하고] 무엇을 안다고[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세 가지 진술은 바로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에 닿아 있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아는 것이 있건 없건 시간만은 만유편재[萬有遍在-삼라만상에 고르게 미칠 따름]일 뿐이다. 누구든지 잎새가 피고 지는 시간을, 밀물과 썰물의 간극[term]을 벗어날 수 없을 뿐이다. 있으면 얼마나 있고, 알면 또한 얼마나 안다고, 잎새가 피고 지는, 밀물과 썰물이 오고가는 그 순간을 영원처럼 살려 하는가?

생활의 절망감, 삶의 위기감, 혹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것을 행복의 지표로 보며 살았겠지만, 성장기는 달랐다.

이를테면 우리네 풍속도에서 일제말기와 전쟁의 회오리바람을 겪은 세대가 느끼는 절망감-위기감, 그리고 닥쳐올 미지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은 형언키 어려운 고통이었다. 더구나 그 어둠의 공간[해방공간+전쟁공간]을 가까스로 견뎌낸 사람에게 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박한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푸쉬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받은 위로와 격려는 어린 영혼과 젊은 혈기에 구원의 메시지 같은 역할을 했음직하다.

어떤 형태로든, 무슨 곡절이든 상실과 결핍을 뿌리부터 지니고 견뎌야만 했던 그 공간의 삶에서 교과서의 표지 안쪽에, 혹은 일기장과 학습장 안표지에, 그것도 아니라면 책상머리에 정성들여 쓰인 게시물이 되었음직하다.

그리고 그런 한 마디 위로, 그렇게 속삭여주는 목소리를 듣고 새기며 어느덧 청춘의 간이역을 지났고, 성년의 광장도 넘어왔으며, 마침내 늙은 몸으로 새삼스럽게 지난 시절 내 영혼을 붙잡아 두었던 묵은 시의 울림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야 고은의 의 공간에 안착한 느낌! 이 강렬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있음과 [세월]의 풍요를 온몸으로 지탱하면서, 겨우 썰물이 빠져나간 생의 막바지를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빈약한 몸을 나무로, 얼마나 많은 잎새들이 피고 또 졌을까, 내 몸을 여과지로, 얼마나 숱한 밀물과 썰물이 다녀갔을까? 그러면서 불안과 두려움은 어느덧 시간과 한 통속이 되어 나의 스승이 되었으며, 남루를 덮을 풍요가 물질에 있지 않고 영혼의 울림에 있음을 이제야 겨우 짐작할 뿐이다. 푸쉬킨이 쓰다듬어 주던 삶을 통과한 연후에 비로소 고은이 지적한 삶의 종착역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는 셈이다.

세월은 삶의 스승이다. 내 어린 시절 두려움의 실체가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요소의 결핍에서 왔다면, 청춘의 결핍은 그것과는 또 다른 것, 생명력이 약동하는 동안 더 많은 잎새를 달아야 하고, 정열이 들끓는 동안 더 많은 물줄기가 밀어닥쳐야 했다. 시들 줄 모르는 욕망이 시들어 떨어지기까지, 굽힐 줄 모르는 정력이 썰물로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의 스승은 인생[]을 끊임없이 담금질할 따름이다. 그것이 인생이요, 그의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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