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女心, 무한한 자유와 감각의 해방감!”
“여심女心, 무한한 자유와 감각의 해방감!”
  • 전주일보
  • 승인 2021.02.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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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女心, 무한한 자유와 감각의 해방감!”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인숙(1958~. 서울)바람 부는 날전문

 

  모르겠다, 진짜 여심女心.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알 것도 같다, 여심을. 아니 감히 여심을 모른다고 발설하다니,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여심을 언감생심 안다고 발설하다니, 제 명에 죽을 수 있을까? 그래도 모르겠다, 여심 그 속내를.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알 것도 같다, 여심 그 야릇함을.

  어찌 알 수 없겠는가? 소싯적, 청춘 총각시절엔 처녀들의 플레어스커트 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참 보기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내 여친이 그런 스커트를 입고 있는 모습을 참 어여쁘게 보았던 때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가벼운 깃털마냥 종종걸음에 맞춰 꽃잎처럼, 아니 나비 날갯짓처럼 나풀거리지 않았던가. 바람이 불면 마치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풀잎처럼 혹은 산위에서 부는 바람결이 바로 그 플레어스커트 자락에서 불어오는 착각도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니 바람 부는 날이면여친과 함께 더 오래 거닐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릴린 먼로가 하는 미국 여배우의 스커트 자락에 넋을 앗긴 적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비운에 간 세기적인 여우! 그녀의 잠옷이 샤넬 No5인가 했다는 가십거리와 결부되어, 환풍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말려 올라가는 플레어스커트 자락을 감아 내리는 모습은 과연 남자들을, 세계의 수컷들을 매혹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여심이 아니라, 그런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남심男心이 아닌가? 이 시는 그런 남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모두가 아니다. 시의 화자가 여자라는 점. 그런 화자가 그려내는 여심이 진짜 시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이면’ “그 바람 속에 뛰어들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는 상쾌함을 그려내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상쾌함이 무엇일까?

  짐작이나마 할 수는 있겠다. ‘스커트 자락의 상쾌!’에 모든 게 담겨 있을 법하다. 이 결구에는 이 시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여자만이 간직할 수 있는 여심의 실체가 담겨 있을 법하다. 앞에서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여친에게서 느꼈던 남심의 그것이 아니라, 여심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여성성만의 그 상쾌!’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서 여심은 이렇게 진술된다. *남심은 모르는 여심[남심이 언감생심 여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벌판을 뒤흔드는 바람 속으로 뛰어들고 깊은 여심[여성의 강인함과 도전정신의 기백은 남성에 못지않다는 것은 모성의 위대성이 웅변한다!],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는 여심[열린 공간, 불어오는 바람 앞에 마주서고자 하는 것이 여성성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스커트 자락의 상쾌[앞에서 밝힌 여성성의 구체성과 감각성이 바로 이 결구에서 집약된다]. 여성만의 특권인 스커트 자락의 상쾌함을 어찌 감히 남심이 짐작이나마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럴 때 여성의 스커트는 숙명이 아니라, 무한한 정신의 자유요, 상쾌한 감각의 해방감이 아닐 수 없다.

  단 5행으로 된 매우 짧은 한 편의 시에 여심이 간직하고 있을 법한, 정신의 해방감이 자유롭게 부풀어 오르고 있음을 본다. ‘바람의 이미지는 매우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체험의 변주로 그만의 바람을 읽어낼 것이다. 누구는 바람에서 계절의 냄새를 맡는다면, 누구는 바람에서 시대의 방향타를 찾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누구는 바람에서 일탈한 사랑의 도피행각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바람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의 활화산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남자들이 그런 섣부른 지레짐작으로 여심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심도 남자들 못지않게 자유로운 삶이 주는 상쾌에 기뻐할 줄 아는 존재이며, 정신의 해방감이 주는 상쾌에 즐거워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대서 요즈음 하기 좋은 말로 페미니즘[feminism-남녀동등권을 주장하는 여권 신장 운동]을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세상의 반은 남자들이고, 그 반은 여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측면으로 보든지, 한쪽의 반이 다른 한쪽의 반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고서는 세상은 온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렇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사람됨의 원형질은 남녀 간에 하등의 차이가 없다. 남자들이 수컷본능으로 자유와 해방을 만끽한다면, 여자들 또한 그들만의 방법으로 자유와 해방을 상쾌하다 한다. 치솟아 오르는 스커트 자락은 그런 감각의 형상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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