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詩眼,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시안詩眼,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 전주일보
  • 승인 2021.02.08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굴비 한 두름에 만 이천 원

만 이천 원짜리 한 두름 사면 또 한 두름은 공짜!

굴비 마흔 마리에 만 이천 원~!

 

영광굴비는 차에서 낮잠 자고

늙수그레한 영감은 홀로 구름과자 삼매경에 빠졌고

젊은 여자 홀로 아리아를 부르며 굴비를 팔고

 

-김고운(1944~전주 )굴비장수 -미망迷妄전문

 

시를 읽는 일은 곧 시심을 읽는 일이다.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이것은 곧 시적 정서에 공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을 로 내세워 말하기도 하고, 혹은 시인 자신은 뒤로 멀찍이 물러난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시인은 누군가를 자신을 대신하는 화자로 내세워 말하기도 한다. 어느 진술 방법을 택하건 시에는 시인의 정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밖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 일정한 느낌이 일어난다. 그것을 감정이라 하는데, 이 감정은 원초적이고 생리적이며 본능적이다. 밖의 사물을 만나서[,,,,,~] 일어나는 느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 느낌이 개인의 체험이나 환경과 결합하여 표현 욕구를 동반할 때, 사람마다 다른 정서情緖가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 일은 곧 시를 써낸 시인의 정서와 시를 읽는 독자의 정서가 어느 대목에서 일치하는가, 아니면 전혀 일치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일치할 때 우리는 미적 감동에 이르게 될 것이며, 일치하지 못할 때 우리는 낯선 정서의 애매성을 탓하게 될 것이다. 어떤 길에 서게 되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정서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시적 공감대를 확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바로 시적 체험의 확장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전 방위에 걸쳐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정서를 통해서, 나의 정서가 감동을 받고, 타인의 체험을 통해서 나의 체험의 밀도를 높이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타인[시인]의 비극적 정서가 나의 슬픔으로 전이될 수 있으며, 타인의 분노하는 시선이 나의 순치된 정서에 저항의 불길을 일으킬 수도 있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시를 읽기 전에는 몰랐던 타인의 구차한 삶이 성가시고 누추한 생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숭고하고 존엄한 생존의 몸부림임을 실감하게 될 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숭고하고 존엄한 삶의 의미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가고자 하는 길이다. 이런 길, 즉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이런 과정의 인간적 체험 활동인 셈이다.

이 작품에는 세 개의 다른 시선을 눈여겨보게 한다. 하나는 영광굴비의 시선이다. 영광굴비는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파리를 날린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상품은 이익을 발생하지 못하며, 그런 상품은 이 상품의 주인들의 상행위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것을 해석하는 일은 앞에서 언급했던 독자가 지닌 정서의 몫이다. 한 가지 귀띔하자면, 우리가 내세우고 있는 나만의 상품들이 저들의 경우와 얼마나 다른가, 한 번쯤 되돌아볼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늙수그레한 영감의 시선이다. ‘홀로 구름과자의 삼매경에 빠져있다. 필자의 정서로 말하자면 이 삼매경이 매우 호감이 간다. 하기 좋은 말로, 생존경쟁의 전선에서 애면글면 아등바등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살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다툼을 저만치 밀쳐두고 망중한에 빠져본다 한들 그리 흠이 될 것도 없다. 담배연기를 공중에 날리면서 저 영감님 지금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꿈을 잃지 않은 인생, 우리 모두가 간직해야 마땅하다.

세 번째 시선은 굴비를 파는 여인이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당사자는 지금 사느냐 죽느냐, 생존의 길목에서 호객하느라 목이 쉬는데 고작 아리아를 부른 것으로 조롱하느냐고. 이것 또한 감상자의 몫이다. 아리아는 오페라 극중에서 불리는 독창곡이다. 명랑한 희극적 아리아도 있고, 비극적 정조를 극대화시킨 슬픈 아리아도 있다. 이 장면은 앞의 두 시선과 대비하면 매우 희극적 상황이지만, 굴비 한 마리라도 더 팔겠다는 여인의 심정에서는 동정을 금할 수 없는 슬픈 노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리아다.

부제로 미망迷妄을 달아두었다. 미망에 사로잡히면 실제로 없는 것을 실제로 여겨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 누가 그런 미망에 빠졌을까? 아마도 시인이 바라본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세 개의 시선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생살이의 비극적 상황이 아닐까, 정서의 촉을 뻗쳐본다. 이런 정서에 공감하자면 볼 수 있는 것만 보는 육안肉眼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볼 수 있는 시안詩眼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그래서굴비장수는 굴비를 파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미망에서 깨어나라고 아리아를 부르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