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좋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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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일보
  • 승인 2021.01.2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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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 스스로 그렇게 되어가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
이동희 시인

 

 

       어느 무인도

늘 다가가던 이웃 마을

코로나19 젖은 걸음으로 잠행하자

골목길은 온통 길을 막고

사람들 출입마저 문을 잠그다

 

울음도 샐세라 숨을 죽이고

도시의 음압병실엔

그믐달 심장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다

 

사막에선 여우비가 곡을 하는지

욕망의 탑을 쌓던, 제국

그들의 금자탑들조차 무릎을 꿇자

 

민초들의 질곡,

그을린 검은 섬으로 떠나고

묘지는 불명인 채

수신인 없는 부음만 떠돌다

                                       -이필종(1944~.전북 진안)어느 무인도전문

어느 무인도는 바로 인간이 떠나거나, 도시가 폐쇄되거나, 사람의 출입이 봉쇄된 공간일 것이다. 인공적인 작용, 인간의 활동이 멈추자 비로소 공기가 살아나고, 침묵이 살아나고, 사색이 살아나며, 마침내 자연이 살아나는 현상도 우리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의 왕래가 뜸해지자 자연이 살아나는 역설 아닌 역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절실히 알아가고 있다. 이쯤 되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알만 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無爲]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어가도록[自然] 인간이 지어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본뜻이다. 그런 실상을 무시한 인간의 마을이 무인도로 변해가는 현실이다.

사람이 살되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무인도에 사는 거나 진배없다. 그것은 사람이 유기체로서 목숨만 유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일 터이다. 그럼 또 무엇을 할 것인가?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가 사람에게는 숨 쉬는 것 말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 이 시의 질문이 담겨 있다.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시를 제대로 읽는 일이고, 그것을 새겨 담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길일 터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야 한다. 단독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야 하고, 타인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사촌이 되어야 한다. 이웃과 이웃이 모여서 우리가 되고, 사회가 되며, 공동체개 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사람다운 삶이 가능할 터이다.

골목길은 온통 길을 막거나’, ‘출입문마저 잠근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상존할 수 없다. 골목은 가장 작은 단위의 소통의 통로다. 출입문은 내가 이웃으로, 이웃이 나에게로 오는 최소한의 경계다. 이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어떻게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겠는가? 길은 길로 이어져야 비로소 사람의 길이 열리고,. 문은 출입할 때 비로소 문의 기능을 다한다. 닫힌 길, 잠긴 문 앞에서 우리는 단절 말고 더 이상 얻을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가상공간을 우리는 무인도라고 한다. 무인도에서는 그런 이웃되기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은 울음도 샐세라 숨을 죽이고’, ‘그믐달 심장이/ 하얗게 부서져 내린다참으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무인도의 풍경이다. 노랫소리는 고사하고 울음소리조차 마음껏 낼수 없는 무인도! 무지갯빛 아름다운 무릉도원은 고사하고 달의 심장마저 하얗게 질린 무인도! 누가 이런 죽음의 섬을 기대하겠는가? 그래도 이런 이미지가 이 시대의 그림이 아니라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멈춰있는 형국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사막이 된지 오래다. 생명수를 기대할 수 없는 메마른 사막에 모처럼 여우비라도 내린다면, 기대는 곧 실망으로 온다. ‘욕망의 금자탑을 쌓던 부의 제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다 모든 경제의 통로가 마이너스로 자라는 시대다. 누가 있어 이 절대위기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시적 화자는 매우 불길한 예감을 결구로 삼는다. ‘민초들의 질곡/ 그을린 검은 섬으로 떠났다고 했다. 아무리 재난지원금이네, 이익공유제네 아이디어가 백화제방[百花齊放; 갖가지 학문, 예술, 사상 등이 발표되어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격으로 외쳐댄다 할지라도 민초들의 언 발에 오줌 누기[凍足放尿]식 처방이 아닐 수 없다. 떠나도 어디로 떠났는지도 모른 채 수신 없는 부음만 떠도는 형편이다.

민초들의 울음만 깊어간다. 명운을 달리한 부모님을 할머니 할아버지를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하는 살풍경, 이는 현대인들에게 엄중한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적 징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코로나19의 기습만 탓할 일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언제나 나타나고 병원균은 어디서나 우리를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런 형국에 아무리 공항을 폐쇄하고, 항구의 문을 닫는다고 해서 그들을 막을 수는 없다.

이제는 생산만능주의 신화에서 깨어나야 하며, 발전지상주의의 꿈에서 깨어나야 함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을 훼손하고 우리가 버틸만한 곳이 지구 말고는 아직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위자연, 자연이 스스로 그렇게 되어가도록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길에서 소통의 문을 찾아야 할 시대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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