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떠나다.
백로 떠나다.
  • 김규원
  • 승인 2020.11.19 11: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금종 / 수필가
백금종 / 수필가

전주 서남쪽 모퉁이에는 푸른 산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백로들이 날아와 터를 잡고 살았다. 나는 가끔 이곳을 지날 때면 떼거리로 앉아 끼룩끼룩 소리 지르고 날개를 펄럭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분명 커다란 새이지만 멀리서 보면 내 유년 시절 파란 잎 위에 몽글몽글 핀 목화송이처럼 고왔다. 또 다른 때는 겨울철 소나무 위에 소복이 내렸던 눈이 녹아내리고 조금씩 남아있는 잔설처럼 아련하기도 했다.

어쩌다 목을 길게 내밀고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 때 그 기세란 가히 주변을 나는 다른 새들을 압도하는 공포의 몸짓이었다. 때로는 멈춘 듯 정지된 상태로, 때로는 벼락 치듯 요동치는 몸놀림은 정중동 자연의 순리에 딱 맞는 새인 듯했다. 목 줄기 따라 흘러내린 유려한 곡선, 눈부시도록 하얀 깃털, 군살 하나 없는 미끈한 몸매는 부드러우면서도 기품이 있다. 그러하기에 백로의 모습은 어떤 현란한 언어보다 마음 저변에 내재 되어있는 순백의 감성으로 그려야만 옳을 듯싶다.

이처럼 아름다운 백로들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백로 공원이라 불렀다. 그들이 이곳에 깃을 내리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우거진 푸른 솔잎 위로 쏟아지는 해맑은 햇살과 산등성이 타고 불어오는 솔 향 가득한 바람, 그리고 가까이에 먹이가 풍부한 세내라는 천이 있기에 둥지를 트는데 제격이겠지. 한 가지를 더하면 솔밭 너머에는 모악산 자락까지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백로들이 그들의 천적을 쉽게 발견하고 피할 수 있기에 한몫했지 싶다.

또 사랑하는 자녀들의 생장 발육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했을 법도 하다. 이처럼 천혜 요소에 터전을 마련하고 아기자기한 사랑을 키우고 가족을 늘려가는 백로들을 바라보며 삶에 지친 우리 인간도 마음에 위로를 받고 고맙게 생각했던 터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로운 백로의 마을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었다. 산이 헐리고 도로가 나고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다. 중장비들이 굉음을 내고, 희뿌연 매연이 산을 뒤덮었다. 새 아파트에 둥지를 튼 사람들은 건강을 다지고 호연지기를 기른답시고 하루가 멀다고 산에 올랐다.

그래서 일까? 후려치듯 산산이 부서지는 수많은 빗줄기와 뇌성벽력에도 꿈쩍 않던 그들이었는데 희뿌연 먼지와 소음과 턱턱 숨 막히는 환경오염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몸과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고통과 신변에 다가오는 어둠의 그림자를 더 참아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지 싶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청정한 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어느 날, 백로 공원에 올랐다. 아무리 숲을 둘러보아도 그 많던 백로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새끼들을 달래고 얼리려 수런수런, 웅성웅성해야 할 텐데……. 먹이 사냥을 나갔을까? 아니면 자녀들 안전교육에 나섰을까? 그러나 실오라기 같은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백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숲에는 정적만 흐르고 센바람이 그들이 떠난 보금자리를 야속하게 흔들고 있었다. 생명의 유희도 사랑의 세레나데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백로가 떠난 현장을 보며 시인 김광섭 님의 성북동 비둘기가 생각났다. 성북동 비둘기도 채석장에서 돌 쪼는 소리와 굴뚝에서 품어져 나오는 구공탄 냄새 즉 환경 훼손과 대기 오염에 더 버티지 못하고 정들었던 고장을 떠나지 않았던가?

그 시절에도 이런저런 환경오염으로 날짐승 들짐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그 피해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아니 그때보다 몇십 배 몇백 배로 늘어 여러 동물은 물론 우리 인간까지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으니 이러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는 지난여름 경험하지 않았던가?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변화로 살인적인 더위와 풍수해를. 이제는 자연환경 훼손은 물론 생태계까지 무너져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의문의 역병이 창궐하여 지구촌 인간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코로나가 박멸되기 전에 또 다른 변이 균이 인간을 기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걱정이다. 모두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의 업보이기에.

지금쯤 백로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어느 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을까? 사람들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면 터를 닦고, 건물을 짓고, 조경하고, 실내를 정리하는 등 수년이 걸리는데 백로들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그들도 안식처를 마련하는데 결코 만만찮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하리라. 짧게는 수일 길게는 수개월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영영 터를 잡지 못하고 떠돌이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설령 산자수려한 곳을 찾았다고 해도 그곳에는 분명 미리 터를 잡은 터줏대감들이 있을 테고. 어느 곳은 이곳처럼 개발 붐이 일어 미세먼지로 휩싸여 있거나 쓰레기로 오염되어 발붙이기조차 망설일 곳이 있을 테니. 사람처럼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되련만 그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갈 완력도 없다. 천생이 순하디 순한 백로들이 아니던가?

계절은 시곗바늘 따라 깊어가고 수은주는 빙점으로 하강하고 있다. 푸르던 잎들도 낙엽 되어 땅 위로 구른다. 그 구르는 잎 위로 스쳐 가는 바람 끝이 차갑다. 찬 서리 내리는 밤이 되면 백로들은 어떻게 지낼까? 그들의 안위가 궁금하다.

백로는 철새이기에 혹여 따듯한 남쪽 나라로 이동했으려니 싶지만, 떠나도 너무 빨리 떠나지 않았는가? 내년 봄에 다시 오려나? 멀리 있는 그 봄이 벌써 기다려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