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소나무
창밖의 소나무
  • 전주일보
  • 승인 2020.10.1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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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우리 집 남쪽 창밖,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듯 보이는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창을 열면 새소리와 함께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인사를 한다. 눈 아래로 보이는 청정한 솔잎은 내 마음을 창밖으로 불러내기 충분하고, 밤새 빚어 두었던 솔향은 산뜻한 아침 공기와 함께 나의 영혼을 맑게 씻어준다.

내게 한없이 고마운 이 소나무지만 어쩌다 이곳까지 옮겨와 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 소나무들의 고향은 푸른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서서 시샘하듯 자라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숲속이었을 게다.

어느 날 산속을 탐색하던 조경장에 간택되어 다정했던 이웃들과 이별의 말도 전하지 못하고 아픔을 뒤로 한 채 제2의 삶에 나섰으리라.

 

새로 뿌리내릴 세상은 어디일까? 궁금했겠지.’

막상 당도하고 보니 아파트의 화단이라. 골짜기 졸졸 흐르던 맑은 물도 마실 수 없고, 산정으로 내 달리는 소슬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어 한동안 외로움에 마음 언저리가 허전했을 터이다. 어깨를 감싸주던 밝은 햇빛과 깊어진 달빛 별빛이 소곤대면 몸피를 한 컷 불리며 익어가기에 바빴던 지난날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겠지. 솔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초목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도 이젠 모두 다 지난 일로 잊어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그루가 아니고 세 그루가 이마를 맞대고 서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의형제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음을 고마워할지도 모르겠다. .

 

살던 고향을 뒤로한 채 삭막한 도시의 정원에 온 이 소나무들은 슬픔을 씹고 있을지 모르나 내 개인으로 보면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이 소나무가 없다면 난 아침은 물론 평시에도 콘크리트 벽면에 대고 말하고 미소 짓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다행히 이 소나무가 있어서 푸른 생명체와 대면 할 수 있고 호흡할 수 있고 때로는 자연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 거기에 산새가 낭랑하게 들려주는 노래를 창가에서 무상으로 감상할 수 있음은 뺄 수 없는 덤이다. 울창한 수림만이 산천을 푸르게 장식한 대자연의 정경이 아니다. 우리 집 창 앞에 의젓이 선 이 소나무들이야말로 오롯이 내 눈을 즐겁게 하는 한 자락의 자연이 아닌가?

 

뿐 아니고 더 큰 행운은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한 곧은 소나무라는 데 있다. 만약 등 굽은 소나무가 심어있다면 6층인 나의 창가에 미치지도 못할뿐더러 산새가 날아온대도 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스쳐 가는 바람도 머물지 못하고 소나무를 보며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을 터이다. 가끔은 새들끼리 드잡이를 하느라 조금 시끄러울 때도 있으나, 노래하듯 지저귀는 소리. 통통 튀어 오르고 내리는 몸짓, 호기심 넘치는 눈망울도 볼 수 있다.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며 한순간 몰아의 경지에 빠진 나를 깊숙한 산중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산객山客에 비유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소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무이기에 기억 속에 남은 인연이 있다.

고향 집 울안 우물가에는 작달막한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우리 할머니를 닮은 등 굽은 소나무였다. 이 등 굽은 소나무는 허리를 구부리고 나날을 살지만, 나의 형제 같은, 때로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 기쁠 때는 그 소나무는 내게 스스렴없이 등을 내주었고, 할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었거나 서러운 일이 있을 때는 이 소나무 아래에서 꿇는 감정을 앞세워 미주알고주알 불만을 토해냈다. 물론 소나무가 내 말을, 내가 소나무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바탕 마음을 주고받으면 왜 그리 후련했던지? 송진처럼 응어리진 속마음이 계곡에 흐르는 샘물처럼 맑아졌다.

 

태풍 마이삭이 몰아치던 아침이었다. 창을 여니 소나무가 비를 흠뻑 맞고 의연히 서 있었다. 다른 나무는 자지러질 듯 휘몰리어 잎을 떨구고 흔들거리며 비명을 지르는데 이 소나무만 어머니의 신음인 양 가냘픈 한숨을 간간이 내쉴 뿐 거의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난날의 비뚤어졌던 삶을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느 장부의 모습 인 듯 듬직했다. 또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갖은 핍박에도 묵묵히 견디며 국민의 편에 섰던 올곧은 지사의 결의 찬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들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쉽게 부화뇌동 하지 말고 분수를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소나무가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소나무를 일컬어 만수지왕萬樹之王이요, 백목지장百木之長이라 했던가? 한편 조그마한 고난에도 쉽게 흔들리고 좌절하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아침에도 창을 열었다. 어제의 소나무가 아니다. 줄기마다 가지마다 붉은빛이 더욱 선명하다. 잎이 푸르고 윤기가 흐른다. 여름의 폭염 속에서, 천둥과 먹구름 속에서, 또 장대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생명의 수레바퀴를 열심히 돌린 성과이지 싶다. 자신이 머금은 향을 남김없이 풀어내는 찻잎처럼 남아 있는 열정을 한껏 쏟아내는 소나무. 그 소나무의 강렬함이 내게로 다가선다

 

소나무야, 어디에 살든, 어떤 고난이 닥치든 건강하게 살자. 청아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이슬비로 내리면 푸르게, 푸르게 살아가자. 네가 청정하면 나 또한 네게서 푸른빛을 얻을 수 있으리니.’ 생이란 어느 순간도 호락호락 넘기지 않고 멈추지 않은 열정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연의 축복은 스스로 느끼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 소나무와 산새를 창밖에 두고 무시로 벗하며 가까이할 수 있음이 마음자리에 내려앉은 작은 위안이다. 솔향이 살며시 코끝을 스치면 나도 어느덧 한그루의 소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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