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사대주의 속 한글날에
언어 사대주의 속 한글날에
  • 전주일보
  • 승인 2020.10.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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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 편집고문
김규원 / 편집고문

며칠 전에 영끌 투자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누리집에서 보았다. 영끌, 도대체 짐작할 수 없는 단어에 온갖 궁리를 하다가 할 수 없이 검색 본능으로 찾아보았더니 영혼까지 끌어 모은이라는 의미로 젊은이들이 쓰는 말이라고 나와 있었다.

청소년들의 줄임말이 홍수를 이루는 최근이니 이런 정도는 약과라고 할만하다. 넘사벽, 깜놀, 지못미, 남사친, 인싸, 낄낄빠빠 따위의 줄임말은 이제 필자도 알아들을 만큼 되었다. 국립 국어원에서도 이런 줄임말 가운데 널리 쓰이는 단어는 사전에 등록하기 위하여 정리하는 듯하다.

우리말은 순우리말에 한자어와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가 더해져서 가뜩이나 단어와 어휘가 많다. 이런 줄임말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나이든 이들은 청소년이나 젊은 층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계층간 언어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오늘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 예쁜 말들을 깡그리 버리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줄임말을 만드는가 하면, 정부와 자치단체들까지 가세하여 국적 불명의 언어를 만든다.

주인은 모르는 사업 이름

각 지자체가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마다 우리말은 거의 없고 외래어가 혼합된 야릇한 이름을 짓는다. 하긴 지자체의 실무 공무원들이 대부분 젊은 층이니 그들의 취향대로 사업명을 정할 터이다. 그러나 정작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장년층 이상 노인이 대부분인 걸 생각하면 이런 외래어 혼합 사업명은 국민을 무시한 행정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공무원의 자세는 언제나 봉사자이어야 한다. 자신들이 주인인 국민을 가르치고 이끈다는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 아직도 일부 자치단체장들의 모임을 목민관클럽이라고 짓고 고치지 않는 걸 보면 그들의 속내를 잘 알 수 있다.

목민(牧民)은 고을의 원님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말한다. 목민관클럽이 아니라 상머슴 모임이래야 적절한 명칭이다. 감히 머슴이 주인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이니 제대로 된 머슴 노릇을 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정부에서부터 그린뉴딜이니 하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판에 자치단체의 언어 혼란 부추기기를 탓하기도 우습지만, 일부 자치단체의 사업 이름과 내용설명은 쉽게 알아듣기 어렵다. 얼마 전에 목민관클럽 공동대표에 선출된 박성일 완주군수가 지휘하는 완주군의 신문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꽉 막히는 듯 답답했다.

박 군수는 적극적이고 군정 수행을 잘하는 인물이지만 목민관을 자처하거나 영어를 받드는 건 아무래도 고쳐야 할 문제로 보인다. 영어를 혼합하여 새 조어를 하는 건 글로벌도 아니고 언어사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920일 자 기사에는 완주군의 ‘100년 먹거리 메가 프로젝트발표 내용이 나왔다. 그 사업이라는 게 그린 뉴딜 혁신 허브’, ‘농토피아’, ‘공생공진(共生供進) 에코벨트’, ‘소통하니 행복만개라는 이름들을 달고 있었다.

우리말이 끼어 있는 게 신기할 만큼 온통 영어로 가득한 사업명을 보며 이런 계획을 할 수 있도록 표를 준 주인들은 과연 이 사업을 단 1%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922일치 기사에는 완주 바로밀이라는 제품을 출시한다는 내용인데 바로밀이 곡물이름인 줄 알았더니 바로는 우리말이고 은 영어 ‘Meal’을 뜻하는 것이었다. 뭐 그 제품을 소비하는 주체가 젊은이들이어서 그렇다고 치자. 이어서 완주 바로밀을 설명하는 기사 내용에는 ‘W 푸드테라피 구축’, ‘HMR식품’, ‘고품질 프리미엄 밀키트등의 용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기사는 완주군의 보도자료에 나온 내용을 풀어 쓴 것인데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과연 목민관 군수다운 사업내용이고 이름이다. 이런 용어들은 미국인도 한국인도 알아듣지 못한다. 만든 사람과 일부 공무원만 아는, 그래서 주인들은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가 아파야 한다.

물론 이런 사업 이름이 완주군에만 있는 건 아니다. 미국의 51번째 주()에 들고 싶어 애쓰는 사람들이 많고 영어 나부랭이가 끼어들어야 유식하고 고상해진다고 아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니 어쩌랴. 세종대왕이 나랏글을 만들고도 쉽게 내놓지 못했던 그때나 지금이나 머슴들의 머릿속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아름다운 우리말이 더 어렵다?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말이 있을까 싶도록 곱고 뜻 깊은 단어가 널려있다. 또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 단어는 그 정도를 조금씩 달리하여 섬세하다. 영어 따위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우리말이다. 흔히 수필이나 시에서 순우리말을 쓰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며 우리말이 어렵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는 부모나 선생님들이 순우리말을 쓰지 않아 처음 듣는다며 순우리말을 외래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책을 자주 읽거나 부모나 어른들이 순우리말을 자주 쓰는 가정의 아이들은 어렴풋이 짐작하거나 이해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영어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나이든 어른들도 순우리말을 어렵다라는 말로 배척하려 든다. 조선시대에 쓰던 고어가 아니고 우리말 사전에 올려있는 단어를 모르면서 신조어나 영어와 친숙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나라말이 높아져야 나라의 격이 높아진다. 국민 스스로 제나라 말을 무시하고 쪼가리 영어라도 섞어야 유식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야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다.

나라말을 멋대로 잘라 줄이고 남의나라 말을 내말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 한글맞춤법을 잘못 쓴 건 웃어넘기고 영단어 스펠링 틀린 건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나라와 민족이 올라설 수 있다.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영어를 알아듣고도 프랑스어로 대답하는 그들의 자부심을 생각해본다. 우리 한글과 말은 프랑스 어보다 훨씬 과학적이고도 섬세하다. 우리말, 조금만 더 사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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