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 세태 변화 단상
귀성 세태 변화 단상
  • 전주일보
  • 승인 2020.09.23 15: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추석을 맞아 디아스포라와 향우사회에 대한 상념에 젖어 본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두 갈래로 나타난 고향 이탈이 빚어낸 사회상이다.

디아스포라는 민족이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최근의 자발적인 이민 이전의 오랜 역사에선 정복자의 탐욕과 욕망이 빚은 전쟁과 그로 인해 포로와 유민으로 형해화되어 세계를 떠돈 약소민족의 수난과 고난이 배어 있다. 그럼에도 민족마다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하며 연대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인류의 강한 생명력을 장엄하고도 비장한 곡조로 노래한 대서사시에 다름 아닌 셈이다.

향우사회는 디아스포라의 국내 판이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북한 출신 실향민과 산업화와 함께 고향의 척박한 삶을 떠나 개발지대로 떠난 저개발 지대 주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디아스포라를 말할 때 그 결정체로 유대인의 방랑이 먼저 떠오른다. 바빌론 포수 이래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2,500년을 떠돌았다. 급기야 570만 명에 이르는 나치 홀로코스트의 공포시대를 통과한 후 1,450만 명이 남아 310만 명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미국과 소련 등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

한민족의 초기 해외 이주사도 고난의 역사였다. 일제강점 후 국권 회복에 나선 독립지사들과 농토를 빼앗겨 생계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중국 연변, 미국 등지에 흩어져 풍찬노숙하며 한인사회를 형성했다.

 

모천회귀방불한 초기 귀성

 

고향 이탈의 애수(哀愁)는 향우사회라고 다를 바 없었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조상 대대로 한 마을에 머물며 부모형제와 친지 및 이웃들과 등온(等溫)의 체온을 나눈 후 사후에도 그 산천에 뼈들 묻었으니 고향은 존재의 뿌리이자 안식의 터전이었다.

그러니 어쩌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할라치면 실개천 물소리마저 그리웠고(정지용의 향수) 혼백이라도 돌아가길(윤동주의 고향) 염원했다. 애달픈 아리랑 곡조에 깃들어 있는 이산애수(離散哀愁)의 눈물은 우리 민족 원형질의 정핵인 셈이다.

추석 귀성은 그 아리랑 곡조의 변주곡이었다. 따라서 잿빛 앨범 속의 초기 귀성 풍속도는 진한 감회를 자아낸다.

지금은 해마다 밀도가 떨어지고 있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귀성은 말 그대로 모천회귀였다. 거센 물살을 필사적으로 거슬러 태어난 곳에 다다른 후 산란과 함께 생을 마치는 연어의 본능처럼 때때로 대량 압사의 참변을 감수하면서도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 행렬이 정기적으로 이어졌다.

국가기록원의 옛 사진과 퇴색한 신문지면에 장식된 그 귀성의 고초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경이롭기까지 한 것이었다. 고향 행 티켓을 얻기 위해 서울역과 강남고속터미널 주변에 운집해 새우잠을 마다않고, 요행히 표를 손에 넣고도 창문을 기어올라 객실의 화물 선반까지 올라앉은 그 모습은 피난 열차를 방불케 한다.

그러다 보니 안타까운 참변도 빈발했다. 1960년 구정엔 귀성객들이 비좁은 귀성열차에 먼저 타려 한꺼번에 몰려 31명이 압사했다. 4명이 숨지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숨을 1975년 서울역 사고도 대표적인 귀성 참사로 손꼽힌다.

1970년 고속버스가 등장해 귀향 수단이 확충됐지만 혼잡은 여전했다. 암표가 극성을 부리자 대대적인 단속이 되풀이됐다. 귀성전쟁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마이카 시대가 열리고 도로가 확충되면서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추석, 대체휴일제가 처음으로 시행돼 연휴가 늘어나면서 고향 길 소통이 한결 원활해졌다.

 

‘1극 인구지형의 병리 현상

 

귀성전쟁은 추억이 됐지만 추석 또한 옛날의 추석은 아니다. 경기는 얼어붙고 무엇보다 올해는 귀성 행렬이 현저히 줄어들 판이다. 코로나 19에 대한 공포가 방역의 최대 고비가 될 추석 연휴 따뜻한 거리 두기캠페인으로 이어지고, 예년의 귀성 환영 대신 아들, , 며느리의 귀향을 만류하는 기발한 문구의 플래카드가 내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성 세태의 변화는 코로나 때문만은 아닐 터다. 고향의 반대 방향을 향하는 역귀성과 연휴를 즐기는 추세가 새로운 풍속도로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인 작년의 경우 연휴 기간 해외여행을 나서는 인파가 100만 명을 헤아려 인천공항이 북새통을 이뤘다.

향우사회도 예전의 향우사회가 아니다. 1·2세대 향우들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하면서 고향과의 유대감의 농도가 떨어지고 3·4대의 젊은 향우들 사이에선 고향 이탈 의식이 뚜렷해지고 있다.

비공식적 통계를 빌면 한때 전국의 호남향우회는 5800여 개의 광역회와 시·군 단위 지회를 헤아렸다. 1,150만 명에 이르는 전북과 전남·광주 출신의 30% 가까이 참여했던 향우회 회원이 지금은 10%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귀성 풍속도는 바뀌었지만 전북도민들의 고향 이탈 행렬은 여전히 계속되는 현상은 치열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서울 집중화에 이어 수도권 초집중화로 한층 심각해진 한국 사회의 인구지리학은 지방 주민들의 삶을 피폐화시키고 국가의 지속 발전에 심각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해방 당시 남한 인구 2,500만 명의 3.6%90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의 인구는 199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4,300만 명의 23.3%1,000만 명을 돌파했다. 자연증가율보다 6배 이상 불어난 서울의 그 인구는 경기도를 제외한 지방의 이주민들로 채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급기야 지금은 지방 인구 블랙홀이 종전의 서울에서 수도권 전체로 확대돼 있다. 1극 인구지형이 낳고 있는 국가적 병리 현상이 너무나 심각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