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내놓은 사람들
눈만 내놓은 사람들
  • 전주일보
  • 승인 2020.09.2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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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규 원/ 편집고문
김 규 원/ 편집고문

마스크에 가려진 가을, 쓰르라미 소리조차 없이 적막하다.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고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들릴 법도 하지만, 집에 웅크리고 있으니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온라인 앱을 통해 ‘x’ 1상자를 주문했다. 밥하고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날마다 “000번 확진자 오후 2~240xx식당 방문, 그 시간대에 xx식당에 들른 사람은 진료소 방문 바람.” 따위의 재난 안전 메시지에 질려 식당에도 거의 가지 않는다.

얼굴은 없고 눈만 보이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비릿한 분노가 내비칠 뿐, 마스크 뒤에 숨은 마음은 짐작조차 어렵다. 비대면, 언택트(untact)라는 단어가 차츰 익숙해가면서 9월의 끝자락으로 들어선다. 서늘한 날씨에 노랗고 붉은 잎이 곧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할 터이지만, 쉽게 바깥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아직도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진행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침내 새 감염자 수가 100명 이하로 줄었다는 소식이다.

이런 눈만 남은 세상에서 아직도 잘난 얼굴을 세상에 내놓고 다니는 뻔뻔한 족속들이 가끔 눈에 뜨인다. 대개 젊은 청춘들이다. 젊은 층은 치사율이 낮다는 통계와 병에 걸리면 병원에서 편하게 쉰다는 배짱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설마 내가 바이러스에 걸리겠느냐는 요행을 믿는지도.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아서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겨우 퇴원했지만, 아직도 지독한 후유증을 호소하던 어느 젊은이의 후회를 들어봤다면 얼른 마스크를 써야 한다.

 

내 맘대로 사는 게 자유?

 

가끔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상판대기를 들고 쉴 새 없이 떠들며 지나가는 인간을 만나면 속에서 분노가 치민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졌으면 부득이 밖에 나가더라도 마스크는 써야 한다. 행정명령이 아니더라도 나와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예의다. 지난날 기준의 예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엊그제 쉬는 날에 동네 가게에 갔다가 아파트 앞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근에 소재한 V 대학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건너편에서 떠들며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은 마스크도 없이 뭔가 신이 나서 고함을 치고 시시덕거리다가 차가 오는지 흘끗 보더니 빨간 신호등을 보고도 그냥 건넌다. 일행으로 보이는 2~3명이 뒤따라 후다닥 길을 건너고 나서 신호등이 들어왔다.

저게 과연 대학생이 할 짓인지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내 말을 고분고분 들을 거 같지 않고 혹시 행패를 당할까 싶어 나서지 못했다. 불과 10초 남짓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무단횡단을 서슴지 않는 대학생, 그리고 그 행동을 나무라지 못한 한심한 어른인 내가 더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손가락으로 내 마스크라도 가리키며 쓰기를 권했어야 옳았다. 길을 건너와서 그들이 사라진 골목을 몇 번이나 보면서 자책한들 뭐하랴.

마스크는 나만을 위해서 쓰는 게 아니다. 내가 마스크를 쓰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안전하다.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든 이들이 함께 파도가 넘실거리는 위험한 바다를 건너는 쪽배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나마 쓰지 않으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물건이고 백신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어막이다.

 

변한 세상, 달라진 질서

 

앞에 언택트라는 비대면의 영어 표현이 변하여 온택트(ontact)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온라인을 통해서 접촉하는 온라인 접촉이 온택트다. 비대면의 세상에서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온라인을 통해 보충하는 방법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대하지 못하면서 온택트를 통해 화상으로나마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화상회의나 화상 인터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비대면의 부족한 점을 메운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의 매출이 수 십 배 늘은 사실 말고도 국내 온라인 쇼핑도 엄청난 신장을 보이고 있다. 돈의 흐름을 쫓는 자들은 이 변화에 정확하게 적응하여 비대면 상황에 맞는 환경을 구축하는데 열중이다. 노인들조차 온라인 쇼핑을 배우려 애를 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온라인 쇼핑과 키오스크(kiosk : 자동발매기)사용이라는 여론조사 공표도 있었다. 급격하게 달라지는 과학과 생활문화를 나이든 이들이 따라가기는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 변화 속에 우리의 정치는 아직도 7,80년대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정치라는 생물의 생태조차 모른다. 잘해서 국민의 시선을 끌고 지지를 얻는 게 아니라 반대편을 헐뜯어서 흠집을 내고 상처를 만들어 반사이익을 취해보려는 전 근대적인 정치가 아직도 국회와 정가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정치인 본인의 흠이 안 나오면 친족과 방계까지 들추고 탈탈 털어 흠집을 만든다. 아무 일도 아닌 걸 침소봉대하고 그럴듯하게 꾸며 공격하는 마타도어 정치가 정치발전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전북 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이 급변하는 흐름을 이끌어가지는 못해도 흘러가는 대로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묵은 시대의 목민관이니, 군자삼락 따위나 생각하고 있다. 알아서 모셔야할 대상이 국민인데, 외려 머슴인 단체장들이 어른노릇을 하려든다. 이 빠른 변화를 제대로 거니채고 움직이면 그동안 전북이 입만 열면 뇌이던 낙후라는 단어도 떼어낼 수 있다.

적어도 머슴이라면 주인이 힘들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돕고 해결하는데 힘써야 옳다. 단체장이라는 자들이 저들끼리 어른노릇을 해보겠다고 모여 낄낄거리는 사이에 주인의 마음에는 분노만 쌓인다. 코로나 상황도 행정명령만 내놓고 눈만 부릅뜨면 능사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그나마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위기는 잘 넘기면 그게 바로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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