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목을 다듬으며
괴목을 다듬으며
  • 전주일보
  • 승인 2020.08.2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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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이 용 만/ 수필가
이 용 만
수필가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오래 전에 하다만 괴목 뿌리를 다듬기로 했다.

정말 어수선하다. 큰 뿌리 작은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뿌리 사이엔 흙이며 돌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아내는 어수선한 것을 어떻게 다듬으려 하느냐고 갖다 버리란다. 괴목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다. 그 어수선한 걸 다듬어 작품으로 완성했을 때의 흐뭇함과 멋을 모르기 때문이다.

괴목을 다듬고 있노라면 한 편의 글을 쓸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괴목 공예는 뿌리가 좋다. 그것도 금방 몸통을 베어낸 것이 아닌, 뿌리만 남아 몇 년씩 묵은 것이 좋다. 괴목은 몸통이 잘려도 밑동에서 잔가지가 나와 썩지 않고 수십 년을 버티기 때문이다. 잔가지가 나온 부분은 생명을 보존하느라 더욱 단단해지며 붉게 옹이가 박히고 가지가 나오지 않는 부분은 서서히 썩어들어 가면서 신비한 모양과 무늬가 만들어지고 색깔도 여러 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그런 뿌리를 찾아 사방을 헤매는 것이다. 더러 그런 뿌리가 눈에 띄는 것은 한때 많은 나무들을 무차별 베어 냈기 때문이다. 고급 가구에 쓰이는 재목으로 몸통이 잘려 나가고 뿌리만 남아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디며 시간을 응축한 소재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잡목과 가시덤불을 일일이 헤집어보고 굽어보고 다니노라면 온몸이 가시에 찔리고 상처가 난다. 며칠을 고생하다가 덤불 속에 숨어 있는 뿌리 하나를 찾았을 때의 환희는 크다.

글 쓰는 사람이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훌륭한 소재를 하나 찾아냄과 같으리라. 또한 오랜 세월 인고의 아픔 속에서, 상처 난 삶의 치유 속에서 찾아낸 희열이라 할 만하다.

 

뿌리를 찾은 일은 겨우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 때부터 땀 흘리는 작업이 시작된다. 기구도 삽과 괭이가 아닌 곡괭이와 톱, 정과 마치가 동원된다. 정으로 바위를 쪼아내고 곡괭이로 들춰내며 톱으로 잘라 내어야 한다. 가늘고 긴 톱을 바위틈에 집어넣어 뿌리를 잘라야 하는데 괴목 공예는 뿌리가 생명이어서 지면 가까운 곳에서 잘라 버리면 그야말로 볼품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글 쓸 자료가 많아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는 것과 같다. 한 가닥의 생각이라도 놓칠세라 메모지를 빽빽이 메워 놓는 것과 같다. 이리저리 곡괭이를 넣어 파낼 것은 다 파내고 자를 것은 다 잘랐는데도 꿈쩍도 않을 때가 있다. 답답하고 막막하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지 않는가. 얼굴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일사천리로 글이 줄줄 써지는 건 아니다. 머릿속에서는 뱅뱅 돌면서도 도무지 나와 주지 않아 연필만 잡고 애를 태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괴목의 뿌리를 캘 때의 안타까움이 바로 그와 같다.

 

막혔던 글줄이 터지듯이 뿌리가 벌떡 넘어졌을 때의 기쁨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흐뭇하다. 그러나 막혔던 글줄이 좀 뚫렸다고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차례의 기쁨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이, 캐놓은 괴목 뿌리를 가져올 일이 아득하다. 큰 것일수록 힘이 더 든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큰 길까지 가져다 놓는 어려움은 소재를 구한 기쁨에 비례한다고 할까.

 

상당한 건조 기간을 거쳐 괴목이 다 마르면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다. 우선 모양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정한 다음에 도끼나 자귀로 큰 뿌리들을 대강 잘라 낸다. 잔뿌리도 잘라 낸다. 정이나 드라이버로 뿌리 사이에 있는 흙이나 돌을 털어 낸다. 자를 때도 모양을 생각하며 잘라야 한다. 덤벙덤벙 잘라 냈다가는 다시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뿌리 하나를 잘라버리면 균형이 잡히지 않아 전체를 다시 깎아 내어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아깝다고 잘라 내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전체의 조화가 깨어지기도 한다.

껍질을 벗겨 내고 겉살을 깎기 시작할 때에는 과감히 깎아 내어야 한다. 하얀 겉살에 비하여 속살은 색깔도 붉고 무늬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신변잡기나 군더더기를 과감히 버려야 좋은 글이 되는 것과 같다.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은 아무리 아까워도 버려야 한다. 또한 생각나는 것 모두를 다 써넣을 수도 없다. 괴목을 다듬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해 본다. 한 편의 글을 쓸 때도 그러하려니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이토록 조금씩 다듬어 나가는 하나의 작품일진대 나는 내 인생을 괴목을 다루듯이 소중히 다루고 있는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작은 가지 하나, 옹이 하나, 구멍 난 곳 하나도 깎고 문지르고 칠을 하듯이 내 인생의 작은 부분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행여 보이는 부분만 열심히 손질을 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기도 할 일이다.

돌멩이를 안고 움푹 패여 있는 뿌리와 썩어서 구멍이 뻥 뚫린 곳, 옹이가 박혀 있는 곳을 다듬을 때는 마음 한쪽에서 저려오는 아픔이 있다. 저 나무뿌리 하나에도 저리 아픈 곳이 많은데,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아픈 얘기들이 많을까. 괴목을 볼 때 상처 나고 옹이 박힌 부분을 선호하듯이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운 얘기보다는 멍든 사람들의 아픈 얘기가 더 인간적이고 더 진실한 얘기일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은 상처 나고 구멍 뚫리고 옹이 박힌 얘기들을 더 사랑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몸통이 잘려나간 채 밑동을 안고 몸부림치는 저 괴목과 같을 것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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