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
경술국치,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
  • 전주일보
  • 승인 2020.08.2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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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이틀 후 경술국치(庚戌國恥) 110년을 맞는다. 1910822일 조인되고 일주일 후인 29일 발효된 한일병합조약은 국치라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 역사의 최대 수치였다.

학부대신 이용직을 제외한 이완용 총리대신 내각의 이른바 경술국적’ 8명의 대신들이 일본제국에 나라를 통째로 내주는 조약에 서명해 일제강점 36년의 암흑기에 빠져 들었다.

그날의 상처는 110년이 지난 지금도 민족적 자존심에 깊은 트라우마를 새겨놓고 있다. 상흔은 정신적 외상 뿐만 아니다.

현실에 있어서도 외교 문제를 넘어 경제 전쟁으로까지 명명된 한·일 갈등, 친일청산을 둘러싸고 분출되는 국론 분열 등 간단없이 빚어지는 대내외적인 마찰은 그날의 사건이 현재진행형임을 웅변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미래의 이정표

역사의 문법은 과거의 시제로 현재와 미래를 제시한다. 방향타이며 이정표다. 따라서 오늘날 경술년 당시를 생각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를 반추하게 된다. 그 물음의 끝에서 유구한 역사 속에 명멸했던 수많은 왕조, 국가, 민족의 흥망성쇠를 보게 된다.

역사의 그 법칙에 대해 도산 안창호와 윈스턴 처칠은 일찍이 설파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내일이 없다고 준엄한 경고음을 남겼다. 그렇건만 인류는 종종 역사를 망각하고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기 일쑤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리한 혜안을 지닌 많은 역사가와 철학자, 문인들이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탄식했다.

헤겔은 <역사철학 강연> 서론에서 역사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과 정부가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거나 원칙을 끌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앙드레 지드 또한 모든 것은 이미 일컬어졌으나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며 경구의 대열에 합류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역사 서술의 방식이다. 객관적 사실을 허위로 기술할 때 역사의 교훈 역시 오도되기 때문이다. 그 문체의 당위에 대해 동양의 사관들과 서양의 역사철학자들은 오래 전 사실을 사실대로라고 명쾌하게 정의했다.

한편으로 역사의 주체는 우리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는 철칙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문명의 명멸은 외세의 작용과 내부의 대응으로 결정되면서 쳇바퀴처럼 돌지만 그 원인은 결국 나에게 귀결된다.

그렇다면 경술국치에 대한 우리의 역사서술은 과연 사실과 진실에 입각하고 있을까? 아쉽게도 선뜻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물론 책임이 무력을 앞세워 타국을 강제로 병탄한 일제의 침탈에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를 경영한 조선 왕조와 고하 신료, 신분제 사회의 온갖 특권과 부를 독점한 양반 사대부 계급들도 책임론에서 비켜갈 순 없다.

사실이 그럴진대 우리의 역사 서술이 그 불편한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문학,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각종 문화 콘텐츠다. 국가 멸망의 원인을 따지자면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대한제국 황실의 무능과 독선은 제쳐두고 그들을 비운의 개혁 군주, 조선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살해된 황후로 그려내기에 급급하다.

이에 반해 외국의 지식인들은 무능하고 부패했던 조선의 황실과 관료들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중국의 개혁가 량치차오(梁啓超).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은 갈수록 노골화되는데 아무런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보며 망국이 눈앞에 닥친 것을 세계가 다 아는데 조선인들만 모르며 한가하다고 개탄했던 그는 결국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고 진단했다.

오스트리아의 여행작가 헤세 바르텍의 <조선, 1894년 여름>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시사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인도나 중국, 일본의 도시에 도착하면 기이한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이 온갖 귀중품을 펼쳐 놓았다.

서울에서는 오히려 상인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해야 했는데, 그들이 막상 내놓은 것은 상자와 모자, 담배 파이프, 종이로 만든 물품이 전부였다고 기술한다. 주목할 점은 그의 진단이다.

만약 그들이 생계 유지비보다 더 많이 번다면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이다. 이 관리들은 조선의 몰락과 이곳에 만연한 비참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관리의 탐욕은 이윤 획득과 소유에 대한 모든 욕구와 노동의지 그리고 모든 산업을 질식시켰다.”

일본 지주들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조선 양반 사대부 지주들의 살인적인 소작료, 그 위에 겹친 삼정 문란과 고혈을 짜내는 세금 앞에 백성들이 망해가는 국가를 어떻게 보았을지는 자명하다. 량치차오는 경술국치 당일의 조선 시장 풍경을 나라가 망했는데 비탄에 빠진 모습은 볼 수 없고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며 일상에 젖어 있다고 말문을 닫았다.

-도전과 응전의 세계사

20208, 대한민국은 과연 110년 전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항일과 극일, 친일 청산의 목소리는 도처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렇건만 그 목소리의 이면에서 친일청산을 명예와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일부 엘리트들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위안부 할머니 권리 회복을 자임하는 단체의 대표가 국민들의 성금과 정부·지자체의 지원금 유용을 받고 있는 터에 여당은 그에게 비례대표 국회의원 명예를 부여했다. 무소유를 선() 수행의 주요 덕목으로 삼는 종교 단체도 의혹에 휩싸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와중에 전개되고 있는 포스트 민주주의의 조류에 휩싸인 우리 사회는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하며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세계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남북 관계 또한 여의치 않은데 국내적으로는 지역·이념·세대·젠더로 갈려 첨예한 분쟁을 빚고 있다.

하나 같이 미래로 나가기 위해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중차대한 국가적 난제이며 시대적 도전들이다. 우리는 지금 110년 전 역사와 대화하며 그 도전들에 슬기롭게 대응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성찰해봐야 할 경술년 국치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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