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출신은 아니다?
‘호남’ 출신은 아니다?
  • 전주일보
  • 승인 2020.07.15 17: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세상의 눈과 귀가 온통 박원순 서울시장 죽음으로 쏠려 있지만 도무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귓전을 후벼 파는 소리가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를 암시하는 듯한 발언이다.

지난달 비례대표 초선 의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백종원 씨 같은 분 어때요?”라고 말해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이달 1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밖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는 걸로 안다고 말해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관심사는 김 위원장이 언급한 꿈틀거림의 실체가 아니다. 김 위원장이 무심한 듯 덧붙인 한 마디가 벼락 치듯 귓전을 때렸다. “현직 공직자는 아니다. 호남 출신은 아니다.”

 

떠오르는 지역주의 망령

 

김 위원장은 왜 구태여 호남을 특정해 사실과 내용을 부정하는 형용사 아니다를 덧붙였을까? 서울·경기·강원·충청·제주·PK·TK·호남으로 구분하는 우리 사회의 관행으로 따지면 대한민국은 8개 지역으로 나눠진다. 서울·경기를 수도권, PK·TK를 영남으로 묶어도 6개 권역이다. 꿈틀거리고 있다는 인사는 이 중 한 권역의 출신일진데, 그렇다면 아니다에 해당하는 지역은 5곳에서 7곳에 이른다. 그런데 왜 서울도, 경기도, 영남도, 강원도 또 그 나머지도 아니고 호남을 꼭 집어 입줄에 올려놓았을까?

물론 김 위원장 특유의 냉소적 화법의 연장으로 이해하면서 가볍게 흘려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비호남에 뒤섞여 있을 여러 의미들을 콘텍스트(context)로 엮어 곱씹으면 불순한 의도가 읽혀진다. 차기 대선에서 우리사회 병리와 적폐의 근원인 영호남 지역주의 투표의 소환을 겨냥했다는 혐의를 떨칠 수 없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이완된 영남표를 결집해 영남대 호남 구도를 복원하겠다는 속셈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김 위원장에게 가해지는 혐의는 인구공학으로 보는 대선 구도를 이해하면 합리적 의심으로 보다 구체화된다. 가장 최근인 세 달 전 치러진 21대 총선의 영호남 유권자 수를 비교하면 영남의 유권자는 부산·울산·경남 673842, 대구·경북 435972명 등 1,1081,814명으로 전북·광주·전남 4342,209명에 비해 2.6, 6739,605명 많았다.

이런 인구 격차에 기반 한 지역주의 투표는 역대 대선에서 가장 강력한 상수로 작용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작용했다. 치열했던 15대와 16대 대선은 인구공학의 결정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직선제 부활 후 3번째인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39557표 차로 신승했지만 영남에선 9610표 대 4213,842만 표로 무려 3253,832표나 뒤졌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선 PK 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DJ의 후계자로 나섰지만 영호남 지역주의 투표의 공고한 벽을 허물진 못했다. 영남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297910표를 뒤져 전국적으로 57980표를 앞서는 데 그쳤다.

노회한 정치인이자 선거의 달인으로 일컬어지는 김 위원장이 차기 대선의 필승전략으로 영호남 인구 격차와 지역주의 투표 경향을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는 점은 평범한 정치 분석가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 위원장을 보는 불안한 시선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김 위원장이 출세가도를 달렸던 전두환 정권을 비롯해 영남 군사독재정권에서 호남이 소외되고 차별받은 것은 엄연한 역사에 해당한다.

호남 소외는 비단 군사독재 정권의 핵심부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호남인의 품성을 저열하게 선전한 오랜 상징조작으로 인해 적지 않은 지역에서 김대중과 호남에 대한 기피 현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역대 각종 선거에서 호남 대 비호남의 구도를 배태했다. 오늘날 이런 부당한 집단적 이지메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잠재의식에서조차 완전히 해소됐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터에 김 위원장이 통합당의 차기 대선후보를 언급하면서 비호남 출신운운했으니 내심 지역주의 투표와 호남 대 비호남구도를 자극하는 것으로써 필승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의 굿 장단에서 벗어나야

 

김 위원장의 발언에 겹쳐 떠오르는 영호남의 실상은 참담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영호남 공히 모든 경제지표가 한국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처져 공동낙후에 신음하는 가운데 지역소멸의 길로 치닫고 있다.

올해 초 나온 공시지가와 주택 가격은 시사적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올 11일 기준 표준지 50만 필지의 공시지가를 보면 당 전남 21,323(17), 경북 26,255(16), 전북 26,851(15)으로 전국 평균 203,661원에 훨씬 못 미치면서 17개 시도 가운데 나란히 최하위를 차지했다.

아파트 또한 중위가격의 경우 경북 11,825만원(17)와 전북 12,011만원(16), 평균가격의 경우 경북 13,860만원(17), 전북 14,471만원(15)로 나타났다. 지역주의 투표의 한복판에서 양측 모두 빈곤과 낙후에 시달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영호남 주민이 정치판의 굿 장단에서 벗어나 증오와 혐오, 갈등의 지역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시장경제의 바이블인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자신의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의 첫머리를 인간은 비록 이기적이지만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말로 시작한다.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적 발명하기를 통해 희귀하게도 사람들은 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것과 겨뤄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한다.’고 진단한다. 적이 없을 땐 적을 발명해내고 그렇게 창조해낸 적을 악마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론적 우위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공동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가 성숙한 공동체라면 이웃을 적으로 돌리는 사회는 야만적인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영호남이, 어떤 공동체를 구현해야 될 지는 자명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