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참회와 모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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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일보
  • 승인 2020.07.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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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 편집고문
김 규 원/ 편집고문

79일과 10일 연이어 한 사람씩 유명인사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죽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전한다. 아울러 두 사람의 장례를 두고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는 등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7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유언처럼 들리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며 딸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성북구 북악산 등산로 인근에서 경찰 수색대에 말 없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향년 64,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엔 대한민국 최초로 별 4개를 달았다는 백선엽 씨가 향년 100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을 잡기 위해 창설한 만주 특수부대에 스스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동족을 죽인 이력을 갖고 정부 수립 후, 국군으로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한 인물이다. 그는 영어를 잘해서 전쟁당시 미군에게 전쟁 상황을 잘 설명했다고 한다. 미군정하에서도 그는 국방군 장교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 두 죽음에 말이 많은 건 사후 장례문제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의 장례로 5일 장을 치르는 문제를 두고 통합당과 보수세력이 들고 일어나 일제히 반대를 외쳤다. 박 시장의 빈소와 시청 앞 분향소에 시민들이 몰려와 분향하는 행렬을 방해하는 자들도 있었다.

백선엽의 장례는 그를 현충원에 안장하는 문제를 두고 그의 친일 행적을 들어 현충원에 묻힐 수 없다는 반대가 많았다. 반면 통합당 일부 의원들은 그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점을 들어 당연히 현충원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가 현충원에 들어갈 수 없다면 거기 있는 모든 묘를 파내야 한다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

 

19563월생인 박 시장은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82년 대구지검 검사로 공직을 시작했다가 퇴직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986년에 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이사장을 시작으로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되고 2018년 선거까지 내리 3번 서울시장에 당선하여 수도 서울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검사직에서 퇴직하여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언제나 낮은 사람과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크게 떠벌리지 않는 종요한 일처리로 언론과도 별로 친하지 않았던 성품이었다고 한다. 박 시장은 일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시정에 헌신하였고 소신 있는 행정으로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시민 복지와 청년 정책에 과감하였고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확산을 막기 위해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교시설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등 소신을 보였다.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 줄을 잇는 시민들은 그의 과실보다 공을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주도의 4.3희생 유족회와 평화재단 등 단체는 제주도에 박 시장의 빈소를 마련하여 조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제주도 4.3 사건을 조사 규명하던 2001년 당시 박 시장이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 기획단장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진실을 밝혀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세상에 바로 알린 일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박 시장은 여비서였던 사람이 그를 성추행으로 고발하자 바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저지른 성추행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내용이 무엇인지는 당사자가 사망하여 수사 종결 처리되는 바람에 알 수 없다. 또 그 내용을 밝히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여 죽음으로 사죄했다는 점이다.

 

고 백선엽 씨

 

백 씨는 192011월에 북한 강서군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독립군과 중국 항일세력을 토벌하는 만주국 특수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조선독립군을 토벌한 일에 대하여 상관의 지시에 의해 한 일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의미로 얼버무리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얼핏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정신이라고 미화할 수 있도록 말했지만, 만주 군관학교가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중국과 조선의 항일 무장군을 토벌하는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였음을 생각하면 그의 행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박정희도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바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던 것처럼 당시 친일 기회주의자들의 출세 가도였던 만주군관학교다.

백 씨가 한국전쟁 때, 사단장으로 국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최초의 육군 대장이 되었다는 일에 대하여 미군과 가까웠던 그가 전쟁미담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공로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는 일본이 주는 최고 훈장인 일본 제1등 서보장을 받았고 1990년에는 한국 후지쓰 고문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으로 문제가 된 건 그를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는 문제를 두고 독립운동가 후손단체와 시민단체에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서다. 최근에 친일파 인사들의 현충원 묘지 이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던 시점에 그를 현충원에 들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를 현충원에 안장한다면 현재 논란이 되는 친일인사들의 묘를 현충원에 존치하는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친일 인사였다.

백 씨의 반민족 친일 행적과 박 시장의 성추행 사실의 죄 값을 계량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스스로 벌을 내려 일찍 세상을 떠난 박 시장과 일본의 앞잡이 만주군으로 활약하고도 반성하지 않은 채 천수를 누리고 현충원에 안장되는 백 씨를 어떤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염라대왕이 심판하는 저세상이 있다면 두 사람에게 어떤 벌이 내려질지 들여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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