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향기 속에서
밤꽃 향기 속에서
  • 전주일보
  • 승인 2020.07.0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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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이 용 만 /수필가
이 용 만 /수필가

안개 자욱한 임실 갈뫼봉 무등실 언덕에 하얗게 피어 있는 밤꽃.

창을 여니 밤꽃의 짙은 향기가 코끝을 파고든다. 봄부터 핀 꽃들이 다 지고 녹음 울울창창鬱鬱蒼蒼 짙어가는 6월 중순. 햇살도 따갑고 바람도 없는 무더운 날씨다.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선 데다 자동차에서 내려 바삐 걸어오느라 땀이 송송 밴 몸을 식히기 위하여 창문을 열었을 때, 안개 낀 산 아래 하얗게 다가오는 무등실 밤 동산이 산뜻했다.

녹음 속에 뒤늦게 핀 꽃이라 더욱 반가운 꽃이다. 유난히 짙은 밤꽃 향기에 이대로 창을 뛰어넘어 밤 동산으로 달려가고 싶다. 시원한 밤나무 아래에 서서 안개처럼 나를 감쌀 밤꽃 향기에 묻혀 미친 사람처럼 밤나무를 안고 하늘 우러러 하하 웃어보고 빙글빙글 돌아도 보고 싶다. 너울너울 춤을 춘들 무슨 허물이 되랴.

봄의 생기가 여름의 무더위에 묻혀 가고 있는 초여름이기에 기력이 다소 쇠하여가나 싶었는데 하얗게 뒤덮은 밤나무 동산이 기력을 돋아준다.

엊그제 이제 사십을 갓 넘긴 지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도 나처럼 이 곳에서 저 밤나무 동산을 바라보았던 사람이다. 어마두지에 그를 보내고 나서 누구든, 어느 때든 세상에 온 사람은 다시 떠나야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우울했다. 어제는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나누고 잠을 설쳤다.

그 사람 모습이 이렇게 생생한데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의 가족들도 금방 문을 열고 들러올 것만 같다고 한다. 나이 사십에 암이라니 그놈의 암은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어떤 사람에게 달려들며 무엇을 잘못하면 그 녀석에게 걸려드는가.

술도 담배도 저만큼 먼 사람이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남과 다툴 여지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니 마음 다스림도 어느 정도 하고 있었을 텐데 왜 암에 걸렸단 말인가. 모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가 암에 걸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암의 주요인이 스트레스 누적이라는데 그는 어떤 스트레스를 쌓아가고 있었을까. 우리들이 갑론을박 끝에 내린 결론은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였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조용한 그의 성격과 꼼꼼한 습관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을 것이고 언제 한 번이라도 그것을 폭발해 보았겠느냐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자체가 암의 요인이 아니라 그것이 장시간 누적되는 것이 원인이란다.

가끔은 툭툭 터트려 풀어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정신적으로 긴장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스트레스를 장시간 누적시키지 말고 적당히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그의 성격과 상당히 닮아 있는 나였기에 친구들이 너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고 농담을 한다. 속에 담아두지 말고 한 번씩 터트리라고도 한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라니, 내게는 무겁게 쌓인 무엇도 없고 특별히 가슴을 짓눌러 힘든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밤나무 동산에서 풍겨 오는 밤꽃 향기를 맡으면서 지극히 내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 스트레스는 무엇이며 어디에 존재하는가. 스트레스는 어떤 강한 계기를 만들어 터트리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오전 근무를 마치자 나는 기어이 발길을 밤 동산으로 돌렸다. 점심시간 한 시간이면 족한 시간이다. 점심밥이야 한 끼쯤 건너뛰면 어쩌랴. 내일 모레면 밤꽃이 져버릴 텐데…….

밤 동산으로 향하는 들길이 시원스럽다. 제법 키를 돋운 벼들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작은 물결을 이룬다. 한가해진 개구리들이 개골개골울어보기도 한다. 개구리야, 너무 크게 울지 마라. 그 소리 백로 귀에 들어가면 암에 걸리지 않고도 에 세상 떠나는 수가 있다.

한낮의 더위 속이라 밤 동산은 더욱 시원하다. 그늘도 짙고 향기도 그윽하여 온몸이 상쾌해진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를 감싼 밤꽃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들도록 오랫동안 서 있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마음은 천국이다.

조용하던 밤 동산에 차츰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붕붕거리는 벌들의 소리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점차 큰 소리가 되어 밤 동산을 왕왕울린다. 부지런한 벌들이 오늘은 이곳을 일터로 삼은 모양이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하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 하네……들에서 일하는 농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요란스럽게 들려오는 가요 한 구절이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상실감을 흔든다.

그래. 가거라, 젊은 친구여! 너는 어떤 예정된 시간표가 있었기에 차표 한 장도 없이 그렇게도 빨리 갔느냐. 난 서두르지 않고 여기 머무르리라. 이 밤꽃 향기 속에서 너를 잊고 세상을 잊으리라.

세상은 아름다운 것. 저 지렁이 같기도 하고, 송충이 같기도 한, 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밤꽃에서 세상을 잊을 만큼 진한 향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어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하랴.

시내 한복판에서 밤꽃이 핀 줄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에 비하여 산하가 온통 푸르른 녹음 속에 자리한 이곳에서 서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오늘 아침 밤꽃 향기가 침울했던 내 몸에 생기 돋게 해 준다. 그저 그렇게 산들 어떠랴 싶었던 내 마음에 힘내어 열심히 살아라.’ 다독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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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 만

- 시인, 수필가, 아동문학가

-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사무국장

- 한국문학관협회 전라북도문학관 상주작가

- 저서: 유리창 너머의 하늘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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