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 백정기 의사 고택지에서 얻은 생각
구파 백정기 의사 고택지에서 얻은 생각
  • 신영배
  • 승인 2020.06.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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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 대표
신영배 대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지난 3일 전라북도 기념물인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의사 고택지를 지나다가 허름하게 관리되는 현장을 보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 현장을 본지 카메라 고발 기사로 실었지만, 아쉬움이 많다.

전라북도와 부안군의 기념물 관리 부실을 탓하기보다, 나라 잃은 아픔을 온몸으로 저항했던 백 의사의 태생지가 너무 의미 없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백정기 의사는 독립신문이 창간되던 18961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지금의 부안읍 신운리)에서 태어났다. 7살되던 1902년에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지금의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해 살았다.

따로 학교에 다니지 않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19세이던 1915년에 서울로 갔다. 1919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수그러들자 서울과 인천 등지의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계획을 세워 시행하려다 발각, 체포됐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후 전국 각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1924년에는 일본 본토에 침투해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를 시도했으나 발각돼 베이징으로 도주했다. 그해에 다시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기 위해 조선 대표로 출석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해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해 일본군 고위층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고 가담하는 대일 투쟁을 전개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멤버인 백정기와 원심창·이강훈은 1933317일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일 양국의 정계·군부 요인들과 함께 상하이의 일본 요정인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벌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연회장 습격 계획을 수립하고 현장에 가서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되레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체포됐다. 누군가 그들의 거사를 사전에 일본군에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세 사람은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돼 나가사키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백정기 의사는 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4653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獄死)했다. 

광복 후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독립 운동가들이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해 그해 76일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모셨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백정기 의사는 부안에서 출생해 인근 정읍 영원면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에 서울과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일본에 의해 젊은 나이에 순국한 분이다.

부안은 물론이고 정읍과 전북의 자랑이며 영원히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분이다. 그럼에도 부안군은 정읍시와는 달리 백 의사의 생가터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정자와 우물 등을 만들어놓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하찮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그것을 멋지게 각색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스토리텔링에 열을 올리는 자치단체가 얼마든지 있다.

한때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들였던 일본의 지역문화 축제라는 것도 대부분 당초에 그런 거창한 행사가 치러지던 것이 아니라, 사소한 근거를 빗대어 구경거리로 만들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우리나라 자치단체가 이런저런 축제를 만들어내는 것도 지역에 어떤 문화적 특성을 입혀 상품화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예를 들면 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를 간판으로 내세워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지역은 고향인 경남 통영시만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가 박경리가 말년을 원주에서 보냈다는 이유를 들어 박경리를 기념하는 문학공원을 지었다. 이 때문에 매년 수천여 명의 관광객이 원주를 찾고 있다.

물론 소설가 박경리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안에는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문학관이 있고 그의 생가터 청구원과 묘소가 있어서 찾는 이들이 있다. 매창공원도 있다.

부안군은 마실 축제는 거창하게 치르지만, 석정의 시문학이나 구파 백정기의 애국충정을 선양하는 행사나 축제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스토리텔링에 알맞은 매창공원도 활용하지 않고 있다.

전국에 갖가지 축제가 있고 기념시설 등이 있지만, 문화를 입히지 못한 축제나 지역 전통은 단명하게 마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몇 번 가본 후엔 머리에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굳이 부안군만을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전북도 내에서 매년 숱한 축제가 치러지지만, 지자체 예산을 투입하여 공짜구경과 먹고 마시는 축제가 대부분이다.

역사와 진정성이 가미되지 않은 퍼주기 축제에는 생명력이 없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 매년 새로운 메뉴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축제는 한계에 부딪혀 좌초하기 마련이다.

역사가 흐르고 사랑과 낭만이 흐르는 중심축이 있어야 감동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다. 보는 이의 가슴을 흔드는 절절한 정신과 아기자기한 줄거리가 만들어지려면 지역에 서린 정신자원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 줄기에 살을 붙이면 훌륭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진다. 거기에 그 시기에 적합한 출신 인사 등 지역 연고를 활용한 인적자원을 동원해 흥미를 유발한다면 훌륭한 관광 소득원이 될 수 있다.

이런 관광사업에서 지역 간 갈등이나 유사 행사가 겹치기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계절에 따른 축제 시기가 겹치고 여기저기 닮은 꼴 행사가 치러지는 건 전북이라는 범위에서 보면 자멸 행위에 가깝다.

이웃 자치단체끼리 협의한다면 서로 좋은 일이지만, 경쟁적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강행한다. 전라북도가 조정할 수 없다면 14개 시군의 협의기구라도 만들어 조정하고 서로 보완해야 전북이 산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혁명이 정읍과 고창, 부안, 전주로 이어졌던 점을 활용해 차례로 지역을 아우르는 대단위 행사로 계획한다면 좋은 축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주제이든 도내 자원을 총동원해 기획하고 풀어내는 지혜와 양보를 통해 한층 성숙한 지역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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