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방산에서
황방산에서
  • 전주일보
  • 승인 2020.05.2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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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아카시아 향이 바람 타고 밀려오는 산자락, 산책로 간이의자에 앉아 그 향에 취한다. 하늘은 청잣빛, 구름 한 점 없고, 멀리 산그늘에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목청껏 노래한다.

산은 계절의 파도를 타고 여름으로 달리며 무한한 생명력을 분출한다. 한 잎 풀과 한 그루 나무는 물론 갖가지 산새와 작은 생명들까지도 생의 날개를 퍼덕인다.

긴 묵상의 늪에 잠겨있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소리나 몸짓으로 아니면 빛깔과 향기로 나를 흔들어 깨운다.

계절의 흐름대로 여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여름이 되면 그 풋풋함에 들뜬 나머지 산을 찾는 날이 많다. 가을이 풍성함과 완성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젊음이고 성장이며 터지는 환희의 계절이다.

그 젊음과 환희에 충만하려면 산속만큼 더 좋은 곳이 없다. 산은 생명이 넘실거리는 시를 쓰고 폭포수 떨어지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산이 내 뿜는 에너지 넘치는 시와 그림을 내면 깊이 갈무리하길 좋아한다.

눈을 들어 사위를 둘러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천년 세월을 이기며 우뚝 서 있다. 모진 풍파 속에서 묵묵히 견디어 온 굴곡이 등걸로 맺혀 있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봉분들. 사후의 세계를 산 자의 눈앞에 여실히 보여준다.

황방산 곳곳에는 삶의 긴 여로를 마친 사자死者들의 안식처가 즐비하다. 치열하게 살다간 영혼들이 침묵 속에 영면하고 있다. 몇 년을 두고 이 산길을 오르내렸는데 오늘따라 봉분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에 태산처럼 무겁게 다가선다. 삶의 나이테가 더욱 많아져서 그러려니 싶다.

생과 사의 간극間隙은 얼마나 될까?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줄 착각하지만, 시간으로는 찰나이고 두께로는 종이 한 장 아닐까 싶다. 사람이 살다가 죽는 것은 순간이라고 한다.

하루 중에도 낮과 밤이 교차하고 계절에 따라 만물이 소생하고 다시 조락凋落을 거듭하듯 우리의 인생도 변화 속에 한 순간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오늘을 살았다 하되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생의 끝은 예고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끝을 만나면 멈추고 소멸하여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일 터이다. 과일이 열매를 맺을 때 이미 씨도 그 속에 들어있듯, 삶이 시작될 때 이미 죽음의 씨도 함께 잉태되었다. 는 릴케의 말처럼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삶이 끝난 다음에 죽음이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면서 이미 죽음도 그 삶 속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길은 죽음의 길이기도 하므로 언제든 삶의 길이 끝나면서 죽음으로 들어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은 하나의 고리(), 즉 흐르는 시간의 선상에 한 타래로 놓여있는 진행형이고, 우리는 그 고리의 선을 밟아가고 있는 셈이다. 삶에서 보면 죽음이, 죽음에서 보면 삶이 보완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짐작이다.

살아 있는 오늘이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오늘이 바로 살아있음이 된다. 이토록 명징함에도 우리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죽음을 물리칠 방편을 갖지 못했음에도 마치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하긴, 죽음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는가?

며칠 전, 조부모님의 묘소를 헐었던 일이 불현듯 스쳤다. 유골을 화장해서 납골 원에 모시기 위해서였다. 삶의 끝자락에 선 나이임에도 흙을 파내고 석관을 열 때는 조바심과 긴장감이 팽팽했다. 유골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아니면 쉽게 접하지 않았던 사후 모습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흙을 파헤치고 관을 열어 유골을 수습하면서부터는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듯했다.

그리고 유골이라는 눈앞의 실체보다는 살아생전 어린 손자들을 돌보아 주시던 그 자상한 사랑과 정성이 가슴으로 전해 왔다. 나는 짧은 순간 주검의 실체에서 살아생전의 모습을 보았고 또 하시던 말씀들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온기까지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순간만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아니고 포근한 가족이었다. 수십 년을 거슬러 어릴 적 조부모님 앞에 어리광을 부리던 손자로 돌아가 볼 수 있었다.

내가 오늘 황방산에서 여름의 풋풋한 기운을 얻고 나름으로 팔팔한 체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저 봉분의 주인처럼 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철칙이다.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흙을 더럽히지 아니한다고 한다.

나는 짧은 세월을 살면서 세상을 어지럽히며 살았던 건 아닐까? 대답 없는 물음들이 파란 하늘로 흩어져 간다. 다만 푸른 잎처럼 청초하게 살다가 늦가을 낙엽처럼 미련 없이 간다면 더없는 행복이 아닐까 싶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오르던 산길을 재촉했다. 골짜기에 흐르던 계곡물 소리가 산등성이를 타고 울린다.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 노래와 솔바람 소리 그리고 내 가쁜 숨소리가 뒤섞여 엇박자를 이룬다.

비록 불협화음이지만 그런대로 산의 정취에 맞아간다. 아니 산이 그 소리를 너그러이 품었을지도 모른다. 산은 본시 어머니와 같이 너그러운 존재이기에 흐트러진 소리인들 다듬고 고르면서 품어준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그 일부로 살다가 죽어 흩어져 그의 품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자연, 가장 고맙고 가까운 벗인 산이 좋다.

오늘 나는 이 산속에서 나무와 물과 산새와 바람과 한나절 벗이 되고 구름이 되었다. 산허리를 넘을 때마다 청록색 향기를 뿜는 숲이 오늘따라 더욱 싱그럽고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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