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철들 수 있을까?
나도 철들 수 있을까?
  • 전주일보
  • 승인 2020.04.2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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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문 광 섭 /수필가
문 광 섭 /수필가

입춘이 지나더니 날씨가 조금 풀어졌는지 창가에 포근한 햇살이 기웃거린다. 그동안 이른 아침엔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는 바람에 집안에만 눌러있었더니 갑갑하던 차에 K 원로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얼굴 한 번 보게 다녀가라는 당부였다. 머뭇거릴 것도 없이 간단히 차리고서 집을 나섰다.

 K 원로는 우리 나이로 올해 93세다. 보이스카우트 지도자로 만나 어언 40여 년이 넘는다. 그동안 각종 야영 행사와 회의, 그 밖의 일로도 꾸준히 만났고, 최근 20여 년에는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왔다.

가까워진 건 1991년 제17회 강원도 고성 세계잼버리 때다. 나이가 많으신 데도 열정이 넘치고 원칙주의자로서 책임의식이 강한 것에 매료되어 연()을 이어왔다.

 “ 설은 잘 쇠셨어요?”  “ 그럼, 사흗날엔 선영에 계신 어머니한테 가서 , 내년에는 올 수 있을지 몰라하고 왔어.” 그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만나 뵐 때마다 한 번쯤은 꼭 사모곡을 읊으신다. 나 역시도 가까운 친구들한테서 어머니 타령좀 그만하라는 소리를 가끔 듣는 편인데, K 원로에 비하면 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사무치는 건 무슨 까닭일까? 알 듯하면서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작년 가을, 내장산 단풍 나들이 코스와 자동차 편을 점검하느라 정읍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정읍이 고향인 K 원로와 동행했다. 효자동을 출발하여 정읍까지 1시간 내내 80여 년 전 K 원로의 소싯적 이야기가 이어졌다. 선친께서 일찍이 작고하시는 바람에 숙부의 배려로 신태인 화호 소재 일본계 중학교에 진학은 했으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단다. 더구나 토요일이 되어도 집에 갈 형편이 못돼 도서관에서 독서로 주말을 보냈는데, 그때 읽었던 과학 서적과 문학 전집이 평생 지식으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곤 창밖에 펼쳐진 금만경 넓은 들녘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신 어머니께선 애비 없는 자식이 공부하겠다고 객지에 나가 주말에도 오지 못하는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그러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 동리마다 다니며 옷감 행상을 해서 용돈을 마련해 한 달에 한 차례 학교로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때의 어머니 모습을 평생 잊은 적이 없다며 울먹였다. 말문 열기 전 내다보시던 들녘이 바로 그쪽이려니 짐작되었다. 그 말을 듣던 나 역시 가슴이 울컥 치밀면서 60여 년 세월 저편의 영상이 내 시야를 흐리고 말았다.

올해, 101살된 김형석 교수가 칠십 중반이 되어서야 철이 났다고 했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칠십 중반을 넘기고서야 어머니의 굴곡진 삶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조부님을 모시고 사셨는데, 내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름쯤 앞두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행랑까지 딸린 큰 집에 살던 많은 식구가 떠나고 작은할머니와 우리 형제, 어머니까지 넷이서 삼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어머니는 초하루 삭망, 보름 삭망 등 매일 삼식을 대청마루 영실(靈室)에 올렸는데, 날마다 음식 장만하느라 녹초가 되셨다.

저녁상을 물리고 난 뒤 야식까지 올리면 자정이 되어서야 촛불을 끄고 장막을 내렸는데, 그 일은 내 몫이었다. 보통 밤 열 시쯤에 잠들었다가 자정 무렵에 어머니가 깨우면 일어나 영실로 나갔다. 한데, 내가 깰 적마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귀국 때 갖고 온 재봉틀을 돌리고 계셨다. 내가 성년이 되어서도 어머니는 잠도 없고 심심해서 시간 보내느라 그러시는 줄 알았다. 어머니의 고단함과 외롭고 허무한 삶의 아픔은 눈곱만치도 몰랐고, 짐작하지 못했다. 더구나 잠을 쫓으며 미래의 독립생활자금을 마련하신 사연은 훗날 어머니의 실토로 알았다.

K 원로님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삶과 용돈임을 짐작하고서 오직 공부에만 열중했고,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살아생전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도 맘에 걸리는 일이 많다고 회고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육십에 접어든 6월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내가 철이 나더니 칠십 줄에 들어서야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조금씩 알고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다. 공자님 말씀에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으니 진즉 좀 깨달을 나이련만, 돌아가신 뒤에야 깨닫기 시작했으니 무엇이 부족해도 한참 모자랐던 게 분명하다

또한, 어머니 나이가 돼서야 늙은이 심사를 알게 되었고, 육신으로 겪으시던 고통을 내가 당하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어찌하랴. 오늘도 K 원로의 사모곡을 들으며 그분의 말씀 가운데 명기(名器)의 소리가 잘 나려면 오래된 대나무이거나 오동나무여야 하고, 속이 잘 비어야 고운 소리가 난다는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본다

K 원로는 나와 처지가 비슷했지만, 일찍 깨닫고서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60여 년 동안 지성을 다해 모시는 걸 눈여겨보았다. 이젠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나고 구십 줄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애절하게 어머니를 부르는 건 어떤 마음인지 모른다. 당신을 사랑하여 온갖 고생을 무릅쓴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인생의 끝자락에서 오래지 않아 먼저 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일까? 어쩌면 나이가 많아지면서 모든 욕심이 물거품인 것을 깨달아서 태어나던 그때의 빈 마음이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새삼 더 그리워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든 철부지여서 K 원로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90살쯤 되면 철이 나겠지 싶은데, 아무래도 과한 욕심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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