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목 향기 속에
행운목 향기 속에
  • 전주일보
  • 승인 2020.04.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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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 /수필가
백 금 종 /수필가

  계절이 눈을 뜨고 봄소식을 전해 올 무렵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집으로 이사하려면 신경이 쓰이는 일이 한 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새집 증후군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사 들기 전에 보일러 온도를 높인 다음 방문을 확 열고 통풍시키는 베이크아웃이 있다. 아니면 공기정화기를 틀어서 순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도 아니면 식물의 특성을 이용하여 정화하는 친환경적인 방법도 있다.

  그간 두어 차례 새집으로 이사했다. 그때마다 마지막 방법인 식물을 사전에 거의 한 달 정도 옮겨와 공기를 청정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즉 식물의 힘을 빌려서 정화를 한 것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2월 하순으로 이사 날짜가 잡히자 1월 중순부터 고무나무, 행운목, 관음죽, 꽃기린, 스파티필룸 등 그간 집에서 기르던 7, 8종의 식물을 새집으로 옮겨와 공기정화를 도왔다. 그렇게 하면 보일러를 틀어서 나오는 가스비나 정화기를 이용할 때 들어가는 전기료를 절약할 수 있다. 가끔 들러서 물을 주고 혹시나 추위를 타는 식물은 없는지 살피기만 하면 되었다.

  이삿날 새집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옮겨놓은 그 식물들이 어떤 상태인지 살폈다. 고무나무를 비롯한 잎이 두껍고 넓은 식물들은 대체로 멀쩡했다. 그러나 꽃기린은 싱싱하던 잎이 누렇게 변했고 연중무휴로 빨갛게 피어 우리의 거실에 불을 밝혔던 꽃잎이 탄력을 잃고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행운목도 몇 개의 잎이 그 끄트머리에서 메마르고 시들어 있었다. 스파티필룸 역시 파란 잎이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했다.

  추위를 못 견디는 식물은 꽃기린과 스파티필룸이다.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를 포대기로 감싸 아랫목에 누이듯 가장 햇볕이 잘 드는 남쪽 창가에 자리 잡아 주었다. 나머지 식물인 고무나무 행운목 관음죽은 키순으로 적당한 곳에 배치했다.

  이사 후 거실의 온도가 올라가고 내가 자주 손을 보아 주자 식물들도 차츰 잎의 색깔이 본래대로 돌아가고 윤기도 흘렀다. 가지마다 새잎이 톡톡 돋아났다. 추운 겨울을 툴툴 털고 예전처럼 기지개 켜는 꽃들이 대견했다. 특히 잎 사이에서 좁쌀 같은 봉오리가 알알이 맺혀 솟아나는 꽃기린은 앓다 일어난 환자처럼 안쓰러웠다. 몸을 추수 린 스파티필룸도 하트모양 하얀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지 싱그러운 잎 사이로 꽃대를 쏙 올리고 있었다. 사람도 시련을 겪어야 더욱 성숙하듯 꽃기린도 스파티필룸도 예전보다 더 활기를 찾아가는 듯했다.

  그 가운데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행운목이다. 이사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행운목은 크고 작은 가지마다 꽃대가 학처럼 길게 목을 내밀고 포도송이같이 하얀 꽃망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행운목은 여간해서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다. 행운목 꽃은 기르는 사람이 일생 중에 한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게 피는 꽃이며, 정성으로 사랑을 다 해야 10년에 한 번 정도 필 정도로 꽃 피우기가 어려운 식물이라는데.

  몇 년 전에 이사할 때도 그랬다. 그때도 2월에 이사했었다. 이번과 같이 새집 증후군을 지운다고 식물들을 한 달 여정도 미리 가져다 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 봄에 행운목이 함박꽃처럼 탐스럽게 피워 나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던 적이 있었다. 따스하게 겨울을 난 봄에는 꽃피울 기색조차 보이지 않던 행운목이라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평소에는 감감무소식이던 꽃이 이사 후에 흐드러지게 피어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해 주고 향기까지 선사한 것이다.

  행운목의 향기는 정말로 매혹적이다. 낮에는 없는 듯 다소곳이 있다가 석양만 되면 온 집안을 향기의 정원으로 만든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끼리 정열을 다해 사랑하듯 몇 년 만에 핀 꽃이라 그런지 온몸에 품고 있는 향기를 남김없이 발산하는 듯했다. 다소곳이 앉아 코를 가까이 대고 깊게 숨을 들어 마셔 본다. 가슴 깊숙이 파도처럼 파고드는, 이 주체할 수 없는 향기, 몇 마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향기.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도 그 향기에 취한 듯 한나절 벗이 되어 머물다 간다.

  행운목은 평소에는 몇 해가 지나도 피지 않다가 이사 때 옮겨놓은 다음에 오는 봄에는 필까? 나는 봄철 이사 때마다 꽃을 피우는 걸 보면서 나름대로 그 신비한 비밀을 유추했다. 행운목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기에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동안 자연환경이 아닌 인위적 온도와 대기 속에서 편안하게 사는 바람에 꽃을 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새집에 옮겨와서 약간 춥고 건조한 조건을 견딘 뒤에 다시 환경이 좋아지자 꽃을 피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질서는 어김없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이 그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물과 거름만 퍼주니 꽃이 피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아니라면 행운목은 이사를 위해 먼저 새집에 오면서 나쁜 공기와 낮은 온도 건조한 극한환경을 견디며 서둘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유전자를 남기려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우주와 자연을 10%도 모르면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훼손하고 있다.

  요즈음 온 지구의 재앙으로 다가선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도 허술한 과학으로 편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자연의 섭리를 무너뜨린 결과가 아닌가 한다. 산업이 발전함에 우리의 생활은 풍족해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기후에 이상이 오고, 변화된 기후에 의해 새로운 변종들이 발생하다 보니 거기에 대처하지 못한 인간들이 치명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또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생태계가 균형을 잃을 때 상상하지 못할 재앙이 닥쳐올 수 있음은 경고하는 것은 아닌지.

 

  행운목이 분에 넘치는 향기를 보내주어 답답한 가운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나무나 사람이나 자연의 섭리에 순응할 때 본래의 가치가 살아난다는 가르침까지 얻었으니 내게 행운이 겹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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