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 진일보’의 결기를
‘백척간두 진일보’의 결기를
  • 전주일보
  • 승인 2020.04.0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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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한국 언론이 47, ‘신문의 날을 보냈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판 민간신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맞아 1957년 언론인들이 제정한 날이니 우리나라 신문 역사 104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로써 어느덧 64회째를 맞았지만 언론인들이 스스로 신문의 날을 제정한 뜻은 당시와 오늘이 다를 수 없다. 구한말 개화파들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고 민족을 개화해 자주와 독립, 민권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함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종말로 치닫던 때 언론인들이 신문의 날을 제정한 취지도 <독립신문>의 창간정신을 계승해 민주와 자유 언론의 실천의지를 새롭게 다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첫 신문주간의 표어가 신문은 약자의 반려였음을 상기하면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

하지만 올 신문의 날을 맞는 감회는 또 한 번이라는 의례적인 수식어다. 언론으로써의 역할과 소임은 변함이 없건만 오늘날 신문들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때 그저 해마다 날짜에 맞춰 돌아오는 기념일일 뿐이라는 탄식이 절로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신문사들이 예외 없이 기업화된 가운데 자본의 논리에 발 빠르게 순응한 몇몇 중앙지들은 이른바 신문재벌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 와중에 기자들은 기레기라는 대중적 멸시를 받고, 그들이 양산하는 기사는 가짜뉴스논란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 전북의 현실은 한층 참담하다. 도내 지방지와 지역지를 막론하고 만성적인 경영난에 시달리는 가운데 정론지로서의 위상이 나날이 추락하고 있다. 훼손될 수 없는 신문의 소명과 이지러진 현실의 모습은 한 마디 물음을 토해낸다.

전북 언론, 어디로 향하는가?”

-‘산 언론죽은 언론

원론적인 물음에 원론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커뮤니케이션의 어원은 ‘Communis' 또는 'Communicare’에서 유래하고 있다. 라틴어의 그 뜻이 함께 갖는다’ ‘나누어 갖는다로 해석되니 공유분유를 의미한다. 여기에 대량이라는 단어가 합성돼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되니 언론은 대량 전달을 통한 대중의 공유라는 풀이가 된다. 그 공유의 대상이 정보임은 말할 것 없다.

생명체에 있어 정보가 갖는 의미를 성찰하면 언론의 사명은 한결 뚜렷해진다. 언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윌버 슈람(19071987)<대량전달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대량전달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은 왜 자는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어리석다.

사람은 배고프기 때문에 먹는다. 피곤하기 때문에 잠잔다. 사람은 집이 불타고 있기 때문에 불이야 라고 소리친다고 설파한다. 정보는 공기처럼 생명체 유지를 위한 필수 요소인 셈이다.

인간의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그 정보를 언론은 대량 전달을 통해 교류시킨다. 그리고 교류는 일방통행의 막힘이 아닌 쌍방향 통행의 소통을 속성으로 하고 있다. 선인들이 언론언로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체의 피를 나르는 혈로(血路)’로 비유한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산 언론죽은 언론의 구분은 대중들에게 대량으로 공유시키는 그 정보가 진실인가 허위인가, 일방적인 전달인가 쌍방향의 교류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가 진실 되고 쌍방향일 때 사회는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미래를 향하게 된다. 반면 일방적이고 일방향일 땐 혼란과 갈등을 부추긴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헤럴드 라스웰(1902~1978)은 언론의 이런 기능을 두고 사회 각 분야의 상호 조정, 사회적 유산의 세대 간 전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라스웰은 더불어 대중매체에 대해 환경 감시 기능의 대행을 불가피하게 요청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고 충고한다.

-記者의 소명, ‘사실은 사실대로

신문의 날, 그 마땅하게 수행해야 할 소임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성찰해 본다. 내면의 거울에 비치는 것은 온갖 장애를 입은 자화상이다. 무엇이 오늘날 한국 언론의 정체를 부르고 있는가? 대외적·대내적으로 다층적·복합적 요소가 겹쳐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요인 중 하나가 경영 환경에서 비롯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 신문 경영에 가해질 위협은 오래 전부터 예견돼 왔다. 영국의 디 인디펜던트창립자 휘텀 스미스가 내걸었던 노 프라핏, 노 인디펜던트(No profit, No independence)' 모토는 편집권 독립의 절대적인 전제로써 수익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 연장선에서 미디어가 결국 국가와 자본에 의해 침해받아 공적 영역으로써의 성격이 쇠퇴한다. 국가와 자본에 의해 왜곡되는 미디어는 결국 대중조작의 도구가 된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경고음도 들려온다.

하버마스의 경고음은 전북의 현실에서 더욱 큰 위협으로 증폭된다. 기사 논조에 따라 광고 배분을 당근과 채찍으로 악용하는 사례들이 자치행정 주변에 만연돼 있다. 그렇다고 언론의 본질이 뒤바뀔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독립 언론이라면 기업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마르크스의 충고와 자유·독립 언론이라면 생존수단이 존재 이유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끌림에 따라 칼날 같은 자세를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기자의 소임도 되돌아보게 된다. 후한의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는 기사자야(記事者也)’라고 풀이한다. 오늘의 기자(記者)와 빼닮은 이름에서 기자라는 직업의 본질은 정확한 기록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이는 서양이라고 다를 바 없다. 키케로는 역사의 그 문법을 허위는 무엇이든 기록돼서는 안 된다. 진실은 무엇이든지 주저 없이 기록하는 것이 역사의 제1원칙이다고 설파했다. 랑케의 어투를 빌자면 사실을 사실대로라는 말로 정리된다.

 64회 신문의 날, 그들의 조언은 전북의 신문기자들에게 기자정신의 재무장을 요구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백 척 장대 끝에서 한 발 더 내딛는 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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