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는 유권자
심판하는 유권자
  • 전주일보
  • 승인 2020.03.2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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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판도라 상자가 열렸을 때의 세상이 흡사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질병, 슬픔, 가난, 전쟁, 증오 등 모든 악들이 일시에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유령처럼 떠돌았다. 단 한 가지, 희망만은 여전히 상자 속에 갇혀진 채로.

21대 총선정국의 판도라 상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협잡, 정략, 음모, 배신, 철새정치, 패거리 정치, 이합집산, 국회의원 꿔주기 등 한국정치 70년사를 통류해 독버섯처럼 피어났던 온갖 악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여기에 곁들여 4.15총선을 앞두고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신종 괴물, 위성정당은 이 모든 것들 중에서도 압권이다. 카오스를 방불케 하는 혼란 속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신화 속 판도라 상자와 닮았다.

 

총선정국의 판도라 상자

어지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정치란 무엇인가?” 2500년 전을 전후해서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동서양의 두 철인(哲人)으로부터 답을 구한다.

중국 춘추시대를 살았던 공자는 제자 자공의 물음에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분하게 하고 백성이 신뢰하게 하는 것이다고 세 가지를 들었다. 그리고 그중 불가피하게 포기해야 할 경우 군비, 그 다음으로 양식을 말했으니 결국 신뢰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체로 다가온다.

백성의 신뢰는 정치가 위정자의 사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공익을 위해 작동할 때 싹 트고 말과 행동이 진실해야 튼튼하게 뿌리내릴 것임은 말할 것 없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정치 참여는 좋은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좋은 삶을 지향하는 정치공동체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정의를 구축하기 위해 또는 실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와 논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좋은 삶의 내용을 함께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치학자들은 참여의 평가를 두 가지 기준에서 살핀다. 참여의 비율과 참여의 조건이다.

참여 비율은 말 그대로 투표율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숙된 민주주의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참여 조건,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이다. 강압의 배제와 제도적 장치 및 개방된 정치문화가 필수적인 요건이다. 제도가 아울러 자라나야 하고 시민의 정치 사회화가 이뤄져야만 정치문화는 건강을 누린다.

참여가 열리는 창구는 정당이다. 정당은 이념과 의견과 이익의 집산지다. 국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정강과 정책으로 수렴해 대변하는 것이 정당이다. 그 정당이 그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데에 우리 정치의 비극이 있다.

정당이 국민의 이해를 올바로 대변하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참여에 바탕 한 자생정당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정당들은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인물 중심의 외생정당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 독재정권을 뒷받침 한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이 대표적이다.

 

타락수구의 교훈

오늘날 한국사회의 제도적·절차적 민주화는 거의 완비됐다.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 참여가 보장돼 외생정당의 토대가 구축됐다. 그러나 정치가 국민의 삶을 행복하게 가꾸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정치가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난의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정당문화가 아직 외생정당의 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가적으로는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독재의 사슬은 끊어냈지만 정당 내부적으로는 대통령과 차기 대권 후보로 돌아가는 독재시대의 정당문화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책임정치의 실종도 그 원인 중 하나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중 하나는 권한 있는 곳에 책임 있다는 규칙이다. 그리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우리사회 최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책임으로부터는 일반 시민보다 오히려 더 자유로운 게 엄연한 현실이다.

책임정치의 실종은 1차적으로 심판하지 않는 유권자에서 비롯된다. 일상생활에서는 정치의 무능과 부패를 소리 높여 비난하지만 막상 선거 때만 되면 기성 질서를 온존시키는 투표행위를 한다. 유권자의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4.15총선정국의 혼란을 부른 위성정당 사태의 책임 소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발단과 진행 상황을 따라가 보면 미래통합당에서 추진해 더불어민주당이 가세했다. 그 결과 오십보백보라는 양비론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먼저 이탈해 백보를 도망간 병사로 인해 전열이 무너져 다른 병사가 나중에 이탈했다면 그 책임의 경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책임 소재를 가렸다면 심판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까?

루쉰은 산문집 <투창과 비수>에 실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글에서 타락수구(墮落水狗)를 말한다.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던 악인이 실족해 동정을 구걸하면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조차 불쌍히 여겨 용서하자고 말하지만 악인은 어느 날 슬그머니 본성을 드러내 온갖 못된 짓을 되풀이 하는데, 그 원인은 물에 빠진 개를 때려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판셈이니 악인에 대한 징치를 분명하게 해두지 않고 어설프게 용서하는 페어플레이는 더 큰 해악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 홍세화도 앵똘레랑스(무관용)에 대한 똘레랑스(관용)는 똘레랑스가 아니다며 무관용엔 무관용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4.15총선에 대한 국민적 심판의 기준은 위성정당만을 이슈로 할 것은 아니다. 각 정당의 공과를 종합해서 표심을 분출시켜야 마땅하다. 다만 지역으로 갈라져 지역 기반 정당들이 울리는 독전고에 따라 부나비처럼 춤추는 일은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후보별로 정치인과 정치꾼을 가려내는 작업도 필요하다.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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