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춘만필(逢春漫筆)
봉춘만필(逢春漫筆)
  • 전주일보
  • 승인 2020.03.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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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 /논설위원
이 현 재 /논설위원

봄이 흐른다. 매화꽃에서 벚꽃으로. 매화가 진 뒤에 봄이 오고, 벚꽃이 진 뒤에 봄이 간다. 매화는 이미 만개했다. 벚나무에도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조만간 매화가 지면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 뒤를 복숭화, 자두, 살구, 진달래, 철쭉 등 온갖 꽃들이 이어받으면 봄은 절정을 구가한다.

아직은 겨울의 뒷자락에 서 있지만 봄은 우리 주변을 서성거린 지 오래다. 지난 겨울은 봄 같은 겨울이었다. 가뜩이나 동이불사동(冬而不似冬)의 뒤안길에 입춘과 우수, 경칩의 봄 절기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더해지고 있다. 열흘 뒤면 춘분이니 태양의 궤도가 밤과 낮, 음양의 균형을 맞추게 된다.

양기(陽氣)의 회복에 발맞춰 물과 바람, 햇살에도 춘색이 가득하다. 생명의 원천들이 기지개를 켬으로 해서 봄은 개벽이다. 산천초목이 모두 깨어나 아우성을 내지르며 새 세상을 열어 간다.

그렇건만 인간사의 봄은 언제일지 기약이 없다. 창궐하는 코로나 19’가 전 국민의 일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다. 그 와중에 21대 국회를 구성할 4.15총선이 한 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봄이 자연의 개벽이라면 선거는 인간사회의 최대 개혁이다. 구체제의 찌꺼기를 일소하고 촛불혁명을 완수할 것으로 기대됐던 21대 총선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판국은 수상쩍기 그지없다. 4.15 총선이 구체제 청산의 아마겟돈이 될 것인가, 개혁의 물꼬를 번번이 돌렸던 반동의 데자뷰를 다시 한 번 현시할 것인가?

 

엇박자를 이루는 자연과 인간의 봄

 

어쨌거나 개화와 함께 봄은 무르익어 간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기러기 날다가 눈, 진흙 밟는 것과 같다고. 그러니 이 봄의 행락을 놓칠 수 없다.

일세의 경세가이자 대문호인 소동파조차 하루살이 삶을 천지에 부치면 아득한 바다의 한 알갱이 좁쌀알이라고 인생의 덧없음을 탄식하며 가을 적벽(赤壁) 아래 배를 띄어 노닐었다. 그리고 강을 스치는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을 두고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는 무진장이라 했으니, 모름지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조물주의 선물이다. 봄의 꽃과 풍광도 전혀 뒤질 바 없는 행락의 무진장이다. 상춘(賞春)을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상춘의 백미는 꽃이다. 그 가장 앞 열에 매화가 있다.

북송의 은사 임포(林逋)매처학자梅妻鶴子.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이른 봄 어느 날 초저녁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매화 앞에 섰다. 어슴푸레 한 월광에 매화 꽃잎이 비치는데 부서지는 달빛이 흩날리는 매화인지, 매화가 달빛인지 알 수가 없다. 시흥이 일어 산원소매(山園小梅)’ 두 수를 읊었는데, 첫 수의 두 구절은 두고두고 애송되는 절창이다. 그로부터 수많은 문인들이 청고하고 아결한 매화를 시재(詩材)로 삼아 숱한 명문을 남겼으니 매화는 압도적인 사랑을 받게 됐다.

疎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성긴 가지 그림자 맑은 물에 어리비치며/ 그윽한 향기 황혼 달에 날려 보내네)

중국과 한국이 매화라면 일본은 역시 벚꽃이다. 4월이면 일본열도는 가족, 연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벚꽃 명소를 찾는 하나미(花見)으로 들썩인다. 일본 헤이안(平安, 794~1185) 시대의 승려시인 사이교(西行)는 벚꽃을 사랑하다 못해 중독에 빠졌다. 절명시 백조의 노래원컨대 ()꽃나무 아래에서 봄날 죽고 싶구나라는 구절을 남겼다.

 

반개시호시(半開是好時)’의 지족과 절제미

 

무릇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는 법이다. 꽃을 완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일 때 남은 인생은 암울하다. 모든 생명체는 영고성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인생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절정의 순간과 정상의 자리에 영원히 머물려는 욕망은 조바심을 낳고, 조바심은 망신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절정의 순간에 지나침을 경계하며 연착륙을 준비해야 한다.

그 진리를 두고 화산처사 진단(陳摶)좋은 장소는 오래 연연해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곳은 다시 가지 말라고 말했다. 소옹(邵雍)꽃을 완상함에 만개한 데까지 이르지 말도록 삼가라고 읊으며 실제로 반개(半開) 한 꽃을 더 좋아했다.

반개시호시(半開是好時)를 노래한 성삼문의 반개산다(半開山茶)’는 만고의 충절로 승화돼 보다 진한 감회를 일으킨다.

我愛歲寒姿(아애세한자)

半開是好時(반개시호시)

未開如有畏(미개여유외)

已開還慾萎(이개환욕위)

(한 겨울의 자태를 사랑하는데/ 반쯤 필 때가 가장 좋은 때/ 피지 않을 땐 피지 않을까 두렵고/ 활짝 피면 도리어 시들려 하네)

성삼문은 또 다른 동백 찬 설중동백(雪中冬柏)’에서 高潔梅兄行(고결하기는 매화와 나란히 하고/ 嬋娟或過哉(어여쁘기는 더러 그보다 낫구나)’라고 읊었다.

산다(山茶)는 동백의 원래 이름이다. 매화에 더불어 설중(雪中)에서 피어나 봄의 개벽을 알린다. 한창 피어난 채로 꽃송이를 통째로 떨어뜨리는 낙화의 기개는 오히려 미풍에 흩날리는 매화를 앞선다. 작시 당시에야 성삼문이 어찌 단종애사를 예감했을까. 역사의 비틀림 속에 동백의 낙화처럼 떨어진 그의 절명이 청사에 깊은 여운을 던진다.

봄을 맞으면서 잊히지 않는 기억은 문재인 대통령의 춘풍추상(春風秋霜)’이다. ‘춘풍추상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문구로 남은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자신은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시절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받은 이 글을 액자에 담아 2018년 봄의 길목에서 각 비서관실에 선물했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다. ‘반개시호시와도 일맥상통한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춘풍과 추상의 대상이 전도돼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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