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만 보고는 몰라
겉만 보고는 몰라
  • 전주일보
  • 승인 2020.02.20 14:2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 수필
김 영 숙/ 수필가
김 영 숙/ 수필가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 자꾸 머릿속을 복잡하게 헝클어 놓는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었어요. 할머니 한 분이 의자에 앉아있는 학생 옆에 서 계셨지요. 그런데 어린 학생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거예요. 보다 못한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그 학생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내렸죠. 속이 다 시원하네요.”

처음에 사연을 들었을 때는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생각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에 은연중에 동조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혹여, 그 학생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리가 불편하다던가? 몸이 좀 아프다던가? 어쩌면 밤새 공부라는 족쇄에 묶어서 일어날 힘조차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날아든 꿀밤 한 대에 얼마나 황당했을까? 물론 어떤 상황에서든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은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아름다운 풍습이고 권장할만한 행위다. 나도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나이든 이들을 보면 자리를 양보하고 일어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몸이 안 좋을 때도 있지 않았던가. 그럴 때는 양보보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오늘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이는 물론 그러한 정황도 생각했는데, 학생의 태도를 보니 노인을 안중에 두지 않는 뻔뻔함이 보였기에 의협심 차원에서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항상 예외라는 경우도 있어서 내 판단이 다 옳지는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다양한 사회, 숱한 사람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는 내가 아는 일보다 모르는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현듯 오래전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탄 버스가 남문시장이라는 정류소를 지나는데 그 정류소는 어르신이 많이 타는 곳이다. 늘 그랬듯 그날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른들이 승차했고 누구는 앉고 누구는 또 서 있었다.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조잘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한 두어 정거장 지났을까?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멘 노인이 학생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아니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버르장머리가 없어. 어른이 탔으면 벌떡벌떡 일어날 일이지. 싹수없는 놈들! 느그들 어디 학교 학생들이야?” 금방이라도 스틱으로 아이들을 한 대 칠 기세다. 갑자기 버스 안이 싸늘해졌다. 어쩌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느라고 어르신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서서 가기 불편하면 여기 앉으셔, 매급시 학생들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맨 뒷좌석에 앉아계시던 노인 두 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아니 불편하다기보다는 요즘 애들이 어른 공경하는 맘이 없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한 거요.”

호통을 치던 노인은 사양도 하지 않고 곧바로 두 어르신이 양보한 자리에 가 앉았다. 앉아서도 화가 안 풀렸는지 아이들을 향해 이런저런 잔소리를 이어갔다.

그만 좀 하시오! 학생들한테만 뭐라 할 일도 아니여. 산에 다닐 정도면 아직 다리는 짱짱하다는 건디조금 전 자리를 양보하고 서 있던 어르신이 큰소리로 꼬장거리는 등산복 노인을 나무라는 말을 보탰다. 학생들이 일부러 그랬든 아니든 듣고 있자니 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러는 도중에 몇몇 학생이 서 있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그분은 학생들 등을 다독이며 한사코 사양했다.

지금 세상이 어디 지난날 같던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들먹이며 나이 먹은 걸 유세하는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노인들이 지닌 지식이나 경험이 세상에 유용하게 보이던 시대도 아니다. 상당수 노인은 지난날 자신들이 모셨던 노인만큼 대접받고 싶어 하지만, 이 빠른 세상에서 노인은 묵은 생각 속에서 헤매는 답답한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지 않던가.

아이들과 대화하려 해도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자동화 시대에 어떤 식당에서는 식권을 끊지 못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밥도 사 먹지 못하는 게 노인세대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적응하며 배우는 노인들은 자리를 양보받기 원하지 않는다. 개인 건강에 철저하여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는 노인들이 어쩌면 웬만한 장년보다 건강한 경우도 많이 본다. 요즘 아이들이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고생하는 걸 아는 노인은 되레 학생을 자리에 앉히려 하기도 한다.

세상을 어떤 틀에 넣어 찍어내듯 똑같은 모양, 같은 생각에 가두려는 건 편견이고 아집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노인이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양보는 강요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순히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회의 미덕으로 포장해서 마치 양보하지 않는 사람을 나쁜 사람, 또는 못 배운 사람, 가정교육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이름 짓는 편협한 사고가 사회를 분열하고 삭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하면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떡 하니 버티고 앉는 이들도 있다. 그럴 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 게 양보에 대한 보답이고 서로 베풀고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양보하지 않을만한 나름의 이유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면 서운함이나 불쾌한 생각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양보는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내 특권을 포기하는 숭고한 정신이다."라고. 내 기준으로 섣불리 판단하여 양보를 강요하거나 오늘 사연자처럼 머리를 쥐어박는 조급함이 사회를 되레 어지럽게 하는 게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진달래 2020-02-20 21:01:01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