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칠봉 이춘재 할아버지
완산칠봉 이춘재 할아버지
  • 전주일보
  • 승인 2020.01.2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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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전주성 중심 관문인 남문을 지척에서 마주보는 완산(完山). 최고봉인 장군봉의 해발이라야 185m의 평범한 고도지만 완전한 산이라는 뜻을 품은 이름은 범상치 않다.

더구나 완산은 전주의 옛 지명이다. 진산인 발산(중바위)을 비롯해 건지산, 기린봉, 황방산 등 도시의 외곽을 둘러싸고 흐르는 숱한 산들을 제치고 지역의 이름을 산명(山名)으로 삼았으니 완산은 이름 그대로가 전주다.

야트막한 높이에 비해 산세는 비범하기 그지없어 내칠봉과 외칠봉의 13봉우리들이 오르락내리락 용틀임하면서 등산코스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주천변 완산동에서는 내칠봉을 따라 매화봉~용두봉~백운봉~무학봉~옥녀봉~탄금봉, 평화동과 삼천동 꽃밭정이에서는 외칠봉을 따라 도화봉~매화봉~금사봉~모란봉~선인봉~검무봉을 차례로 오르면 정상인 장군봉에서 만나 전주 시가지를 사방으로 발밑에 두고 시원스럽게 조망한다.

 

새천년을 연 돌 깨는 망치소리

 

전주를 상징하는 산이다 보니 완산엔 사연과 애환이 곳곳에 배어 있다. 유서 깊은 칠성사와 애달픈 전설을 간직한 금송아지 바위는 그대로고, 초록바위는 1936년 대홍수 후 제방공사로 인해 흔적만 남았지만 여전히 전주시민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초록바위 위 흡월대(吸月臺)는 정월 대보름 여인들의 풍류처였다.

완산은 시대의 전환기에 변혁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초록바위 밑 일대는 조선시대 장대(將臺)가 설치된 군영으로 참형지였다. 그곳에서 병인박해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토벌군과 동학군이 공방을 벌였고, 훗날 농민군 3거두 중 한 명인 김개남이 장대 아래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군사독재 암흑기엔 시민들이 완산의 풍수에 기대 소외와 낙후의 한을 달랬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야와 야당에 머무르던 시절, 호사가들은 완산칠봉의 풍수를 빌어 전주에 7명의 왕이 태어날 지세라며 전주 김문의 김일성과 견훤까지 들먹이다가 아직 몇 명의 대통령이 이 땅에서 더 나올 것이라는 원망(願望)으로 호남정권의 탄생을 염원했다.

근년 들어 완산 외칠봉 들머리에 스토리 하나가 더해졌다. 새천년을 앞두고 언제부터인가 제1봉인 도화봉 초입에 매일같이 정적을 깨우는 망치소리가 들렸다. 팔순을 눈앞에 둔 이춘재 할아버지가 길을 다듬기 위해 돌을 깨는 소리였다. 날마다 수백 명의 등산객이 오르내리지만 불평만 할 뿐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던 사토질의 미끄러운 비탈길을 다듬고 두드려 편리한 등산로로 가꾸고 있었다.

이춘재 할아버지가 완산칠봉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994월이었다. 평생을 해로하는 박해영 할머니와 함께 서울 아들로부터 역분가 해온 후 좋아하는 산을 찾아 완산칠봉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비바람에 쓰러진 소나무 7그루를 일으켜 삼발이를 대고 동아줄로 매달아 소생시킨 후 등산객들이 미끄럽고 가파른 경사 때문에 산행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내친김에 등산로 정비작업에 나섰다.

이춘재 할아버지의 작업은 거의 수행승의 고행과 같은 것이었다. 79세의 노구로 왕복 1km가 넘는 안행지구를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차례씩 오가며 수박만한 돌덩이를 한 번에 하나씩 어깨에 지고 나른 후 다시 망치로 깨 마디게 아귀를 맞추고 삽으로 흙을 떠 빈틈을 메웠다.

태산을 한 삽, 한 삽 떠서 옮기는 것과 같은 무모한 시작이었지만 16개월 동안 눈과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추 같은 반복 작업을 한 끝에 20001070m의 돌계단을 완성했다. 주변의 자연에 전혀 배치되지 않는 장대한 설치미술이자 시민생활에 편익을 제공하는 실용예술이었다. 당시 이춘재 할아버지는 맨 아래 부분 마무리 다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작업이 끝나면 빗물이 넘쳐 행인들의 발목을 적시지 않도록 길 양 옆의 수로를 내겠다는 구상을 들려줬다.

 

도시의 DNA로 가꾸길

 

완산칠봉은 여전히 시민들의 등산처로 사랑받고 있다. 해발고도는 낮지만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업 다운이 역동적이어서 등산의 묘미가 웬만한 산 못지않다. 게다가 산허리를 돌아 평탄한 길도 조성돼 있으니 완산의 품을 찾는 발걸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며 사계절 내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춘재 할아버지가 닦았던 초입의 돌계단은 이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주시가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4년여 전 계단을 허물고 그 위에 야자매트를 깔았기 때문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사토질의 길이 미끄럽고 바람이 심할 때는 먼지가 날려 등산로 초입에 대한 개선작업을 추진했다고 설명한다.

시민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보니 전주시정의 세심한 배려는 탓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다. 팔순 할아버지의 다른 이들을 위한 필생의 헌신을 이처럼 쉽사리 지워버려도 되는 것일까? 윈스턴 처칠의 대답이 들려온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만든다.’

도시의 DNA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DNA는 반영한다. 그리고 DNA가 유전으로 이어지듯 도시는 주민들의 사고와 삶의 양식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쌓여져 국격(國格)과 도격(道格), 시격(市格)으로 착근된다. ‘얼굴 없는 천사가 전주의 시격을 크게 높이고, 그로부터 고양된 시민들이 기부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전주시는 이 점에 주목해 얼굴 없는 천사를 주제로 대대적인 도시재생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춘재 할아버지의 헌신도 그 못지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작은 기억의 조형물이라도 세우면 어떨까? 오가는 등산객들의 산행이 더욱 유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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